과학 연구 바탕으로한 '신 요리법' 개발
정어리 샤베트, 베이컨 아이스크림, 달팽이 죽, 홍차향 조개구이.
맛과 모양을 상상하기 힘든 이 요리들은 세계 최고로 꼽힌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다. 지난 4월 영국의 <레스토랑 매거진>에서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50곳을 선정했다. 결과 1위부터 3위까지가 이른바 ‘분자요리(molecular cuisine)’ 전문점이었다. 50위권에 든 상당수도 분자요리를 표방했다. 전 세계 미식가들의 침샘을 자극하는 분자요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자요리란 재료와 조리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기존과 전혀 다른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조리할 때 분자 단위까지 잴 만큼 정확하고 세밀하게 요리한다는 뜻도 담겨있다. 요리는 손맛이라 했는데 과학이라니. 하지만 요리도 과학의 결과물이다. 음식의 맛은 화학반응을 통해 결정되고, 요리란 분자들 사이의 물리적 변화를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자요리의 모태는 옥스퍼드대학 물리학 교수인 니콜라스 쿠르티(Nicholas Kurti)가 제안한 ‘분자미식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2000년, 스페인 정부가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음식선진국을 따라잡고자 새로운 요리법을 장려하는 과정에서 첫 선을 보였다. 지금도 세계 유명 분자요리 레스토랑들은 분자미식학자들을 고용해 최신 논문을 토대로 액체질소로 과일을 얼리고 아이스크림을 튀기는 등 기이한 시도를 계속한다.
2006년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1위를 차지한 스페인의 엘 불리(El bulli)는 매년 10월부터 3월까지 식당 문을 닫는다. 이 기간 동안 셰프인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a)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재료를 수집한 뒤, 바르셀로나에 있는 자신의 음식연구소에서 이 재료들로 실험하고 새 조리법을 연구한다.
“분자요리의 매력은 기존 요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데 있다”는 <슈밍화>의 신동민 셰프. 아시아에 세 명 뿐이라는 분자요리사 중 한명인 그가 살짝 얼은 풋사과 한 알을 들고 왔다. 숟가락으로 톡 치니 껍질이 깨지며 하얀 가루가 흘러나온다.
“시금치에서 뽑은 색소와 설탕을 섞은 모형에 사과베이스를 넣어 얼린 -196℃ 사과에요. 한번은 나이가 지긋하신 손님이 한 입 드시곤 코로 허연 연기를 뿜어내셔서 웃음 참느라 혼났었죠. 무안하셨는지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친다’며 한마디 하시더라구요”
입에서 눈처럼 사라지는 가루아이스크림의 비밀은 흔하디흔한 원소인 ‘질소’에 있다. “소스는 보통 액체잖아요? 소스를 커피전문점에서 쉽게 볼 수 사용하는 휘핑기에 넣으면 질소기체가 소스를 냉각시켜 반고체상태인 크림으로 바꿀 수 있어요. 이 방법으로 김치맛 휘핑크림을 만드는 거죠. 크림을 액체질소에 넣으면 차가운 김치 가루가 되는 겁니다.”
액체질소로 재료를 순식간에 냉각하면 세포의 변성을 막을 수 있다. 재료 특유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료의 질감을 과자처럼 바삭하게, 눈처럼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 질소는 쉽게 기화돼 인체에 해롭지 않다.
액체질소를 사용하는 방법 외에도 젤라틴을 사용해 푸딩
의 촉촉함이나 치즈의 쫀득한 질감을 얻는다. 우유 거품으로 만든 인절미가 그 예다. 겉모습은 콩고물이 묻은 쫄깃한 인절미다. 젓가락으로 집힐 만큼 단단해 입 안에 넣을 때까지 그 정체를 의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혀에 닿는 순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다.
육류는 가열할 때 기름이 불완전 연소되기 쉬운데 이때 발생하는 그을음에는 고기의 단백질이 변형된 발암물질이 다량 함유돼 있다. 이를 최소화하기위해 조리시간을 단축하거나 로즈마리, 와인 등을 넣는 것도 분자요리법의 일종이다.
신 씨는 원기둥 모양의 유리그릇을 식탁에 내려놓고 유난히 뜸을 들였다. 원기둥을 들어 올리자 연기가 퍼지면서 잘 익은 농어가 보였다. “이 요리는 그릇 안에 숯 연기를 가둬 농어를 ‘식탁 위에서’ 훈제시키는데 포인트가 있어요. 약간 익혀놓은 농어를 훈제하는 시간은 최대 5분을 넘지 않죠. 요리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까지 분석하는 분자미식학을 충실히 따르면 이만한 웰빙요리가 없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선보인 요리는 소금 아이스크림. 로즈마리를 그릇 안에 넣고 태운 뒤, 그릇을 랩으로 막아 그 위에 아이스크림과 액체질소로 얼린 과일을 얹었다. 소금 아이스크림은 단맛과 조화를 이루면서 풍미를 한층 높여주는 염도를 유지한다. 이 염도를 찾아내기 위해 신 씨는 소금 알갱이를 하나씩 넣어가며 염도계를 들여다봤다.
신 씨는 특히 음식의 향을 강조했는데 실제 그의 주방에는 향을 뽑아내는 기구가 있다. 이 기구에 재료를 넣고, 재료에 따라 특정한 온도로 가열하면 수증기가 생성되는데 이를 냉각하면 요리를 완성시키는 향수가 만들어진다. 이 외에도 그는 손님의 오감만족을 위해 접시를 직접 디자인하고, 생생한 색감을 살리기 위해 색소추출기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분자요리 전문점이 속속 등장할 계획이다. 분자미식학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독특한 요리를 개발해 온 세계적인 요리사 피에르 가녜르(Pierre Gagnaire)의 레스토랑이 이르면 내년 3월 한국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