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금치 색소와 설탕을 섞어 만든 모형을 -196도씨의 액체질소로 얼린 '사과'다. 설탕껍질 안에는 사과베이스로 만든 가루아이스크림이 들어있다.


과학 연구 바탕으로한 '신 요리법' 개발
 

정어리 샤베트, 베이컨 아이스크림, 달팽이 죽, 홍차향 조개구이.

맛과 모양을 상상하기 힘든 이 요리들은 세계 최고로 꼽힌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다. 지난 4월 영국의 <레스토랑 매거진>에서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50곳을 선정했다. 결과 1위부터 3위까지가 이른바 ‘분자요리(molecular cuisine)’ 전문점이었다. 50위권에 든 상당수도 분자요리를 표방했다. 전 세계 미식가들의 침샘을 자극하는 분자요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자요리란 재료와 조리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기존과 전혀 다른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조리할 때 분자 단위까지 잴 만큼 정확하고 세밀하게 요리한다는 뜻도 담겨있다. 요리는 손맛이라 했는데 과학이라니. 하지만 요리도 과학의 결과물이다. 음식의 맛은 화학반응을 통해 결정되고, 요리란 분자들 사이의 물리적 변화를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탁에 내놓는 순간부터 훈제되는 농어

분자요리의 모태는 옥스퍼드대학 물리학 교수인 니콜라스 쿠르티(Nicholas Kurti)가 제안한 ‘분자미식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2000년, 스페인 정부가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음식선진국을 따라잡고자 새로운 요리법을 장려하는 과정에서 첫 선을 보였다. 지금도 세계 유명 분자요리 레스토랑들은 분자미식학자들을 고용해 최신 논문을 토대로 액체질소로 과일을 얼리고 아이스크림을 튀기는 등 기이한 시도를 계속한다.

2006년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1위를 차지한 스페인의 엘 불리(El bulli)는 매년 10월부터 3월까지 식당 문을 닫는다. 이 기간 동안 셰프인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a)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재료를 수집한 뒤, 바르셀로나에 있는 자신의 음식연구소에서 이 재료들로 실험하고 새 조리법을 연구한다.
“분자요리의 매력은 기존 요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데 있다”는 <슈밍화>의 신동민 셰프. 아시아에 세 명 뿐이라는 분자요리사 중 한명인 그가 살짝 얼은 풋사과 한 알을 들고 왔다. 숟가락으로 톡 치니 껍질이 깨지며 하얀 가루가 흘러나온다.

“시금치에서 뽑은 색소와 설탕을 섞은 모형에 사과베이스를 넣어 얼린 -196℃ 사과에요. 한번은 나이가 지긋하신 손님이 한 입 드시곤 코로 허연 연기를 뿜어내셔서 웃음 참느라 혼났었죠. 무안하셨는지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친다’며 한마디 하시더라구요”

입에서 눈처럼 사라지는 가루아이스크림의 비밀은 흔하디흔한 원소인 ‘질소’에 있다. “소스는 보통 액체잖아요? 소스를 커피전문점에서 쉽게 볼 수 사용하는 휘핑기에 넣으면 질소기체가 소스를 냉각시켜 반고체상태인 크림으로 바꿀 수 있어요. 이 방법으로 김치맛 휘핑크림을 만드는 거죠. 크림을 액체질소에 넣으면 차가운 김치 가루가 되는 겁니다.”

액체질소로 재료를 순식간에 냉각하면 세포의 변성을 막을 수 있다. 재료 특유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료의 질감을 과자처럼 바삭하게, 눈처럼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 질소는 쉽게 기화돼 인체에 해롭지 않다. 

액체질소를 사용하는 방법 외에도 젤라틴을 사용해 푸딩

▲ 인절미 같이 생겼지만 속은 부드러운 우유거품으로 꽉 차 있다. 우유거품으로 만들었지만 포크로 찍어먹을 수 있다.
의 촉촉함이나 치즈의 쫀득한 질감을 얻는다. 우유 거품으로 만든 인절미가 그 예다. 겉모습은 콩고물이 묻은 쫄깃한 인절미다. 젓가락으로 집힐 만큼 단단해 입 안에 넣을 때까지 그 정체를 의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혀에 닿는 순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다.

육류는 가열할 때 기름이 불완전 연소되기 쉬운데 이때 발생하는 그을음에는 고기의 단백질이 변형된 발암물질이 다량 함유돼 있다. 이를 최소화하기위해 조리시간을 단축하거나 로즈마리, 와인 등을 넣는 것도 분자요리법의 일종이다.


신 씨는 원기둥 모양의 유리그릇을 식탁에 내려놓고 유난히 뜸을 들였다. 원기둥을 들어 올리자 연기가 퍼지면서 잘 익은 농어가 보였다. “이 요리는 그릇 안에 숯 연기를 가둬 농어를 ‘식탁 위에서’ 훈제시키는데 포인트가 있어요. 약간 익혀놓은 농어를 훈제하는 시간은 최대 5분을 넘지 않죠. 요리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까지 분석하는 분자미식학을 충실히 따르면 이만한 웰빙요리가 없을 겁니다.”

▲ '통통'랩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도넛보양의 로즈마리 향기
마지막으로 선보인 요리는 소금 아이스크림. 로즈마리를 그릇 안에 넣고 태운 뒤, 그릇을 랩으로 막아 그 위에 아이스크림과 액체질소로 얼린 과일을 얹었다. 소금 아이스크림은 단맛과 조화를 이루면서 풍미를 한층 높여주는 염도를 유지한다. 이 염도를 찾아내기 위해 신 씨는 소금 알갱이를 하나씩 넣어가며 염도계를 들여다봤다.

신 씨는 특히 음식의 향을 강조했는데 실제 그의 주방에는 향을 뽑아내는 기구가 있다. 이 기구에 재료를 넣고, 재료에 따라 특정한 온도로 가열하면 수증기가 생성되는데 이를 냉각하면 요리를 완성시키는 향수가 만들어진다. 이 외에도 그는 손님의 오감만족을 위해 접시를 직접 디자인하고, 생생한 색감을 살리기 위해 색소추출기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분자요리 전문점이 속속 등장할 계획이다. 분자미식학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독특한 요리를 개발해 온 세계적인 요리사 피에르 가녜르(Pierre Gagnaire)의 레스토랑이 이르면 내년 3월 한국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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