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전 6시. K대학교 앞 2차선 도로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에서는 뺑소니 차량에 의한 교통사고로 추정했다. 시체를 부검실로 옮긴 후 검시를 시작했다. 두개골은 부서져 뇌가 돌출돼 있었고 목, 어깨, 상·하지에는 광범위하게 찰과상(또는 표피박탈)이 관찰됐다. 왼쪽 허벅지는 골절이 있어 구부러졌다. 오른쪽 무릎과 대퇴부에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 아스팔트(타르)가 상당량 묻어 있었다.

시체의 피부에 형성된 시반(사망 후 피부에 생기는 반점)과 근육의 경직 상태로 보아 죽은 지 8~12시간쯤 경과된 것으로 보였다. 대퇴부를 절개하자 출혈이 없었다. 보통 심장이 뛰고있는 사람은 모기에 물렸을 때도 빨갛게 부어오르는 등 염증반응이 일어난다. 이런 염증을 생활반응이라고 한다. 그러나 심장이 멈춘 뒤에는 생활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염증반응 중 하나인 출혈이 없다는 것은 죽어있는 상태에서 차량에 충돌했다는 증거가 된다. 목에 있는 상처부위도 절개를 했다. 출혈의 흔적이 있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졸림을 당했다는 것이다. 강간 후 살인했다는 심증을 가지고 사타구니를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걸어가던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에 자동차의 범퍼가 먼저 보행자와 충돌하게 된다. 하지만 자동차 범퍼 충돌로는 사람의 피부 중 가장 안쪽부분인 사타구니에 상처가 나기 힘들다. 예상대로 사타구니 안쪽에는 예리한 흉기로 찔린 작은상처가 하나 있었다.

다음 날, 경찰은 소견서를 토대로 시체가 발견되기 8시간 전 A양과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B군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결국 강간하고 살해한 후 교통사고로 위장했다는 B군의 진술까지 받아냈다. '생활반응'으로 교통사고사를 타살로 바꾼 사건이었다.


▲대퇴부(왼쪽)를 절개했을때는 출혈이 없었고, 목 부위(오른쪽)를 절개했을때에는 출혈이 있었다.
/일러스트=정서영


위 사례는 지난 1986년에 있었던 여직공 살인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드라마에선 수십가지의 검사방법을 사용하지만 실제사건에서 이용되는 법의학 검사방법은 사망의 종류에 따라 2~3개로 한정돼 있다.

미국드라마 CSI의 성공으로 법의학이 관심을 모았지만 정작 법의학의 개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회의학에 속하는 법의학은 죽은사람만 대상으로 하며 그 중에서도 질병이외의 사인에만 적용된다. 법의학자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에 따라 법의학은 △법의병리학 △법의혈청학 △법의임상학으로 나뉜다.

법의병리학은 시체를 검안, 부검하는 검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주검의 사망시간, 사망 후 경과시간, 치사방법, 사용흉기 등을 가려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몸의 색깔이 변하는데 그 중에서도 핑크빛으로 변한 시체는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법의혈청학은 혈액, 타액, 정액, 모발 등과 같은 인체의 분비물이나 조직으로 신원을 식별하는 방법 등을 일컫는다. 지난 1994년, 무덤 속 한 유골을 두고 서로 자신의 아버지라 주장하던 두 집안의 싸움은 결국 유전자 감식으로 해결됐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유전자감식이 이뤄졌던 사건이었다.

법의임상학은 보험사기와 자해공갈이 많은 요즘 증거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사의 의료행위 시 과실유무도 판단한다.

법의학은 사인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람에게 그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 해준다는 점에서 인권보호와 연결된다. 문화가 발달해도 사회인권시스템이 발달하지 못한 나라에서 법의학은 발전하기 힘들다. 한국도 법의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없어 법의학발전이 미미한 상태다. 경북대학교 법의학교실 채종민교수는 "법의학을 전공한 사람은 전국의 30여명밖에 되지 않는다"며 "부검을 할 수 있는 법의학교실은 전국에 몇 곳이 안되며 부검실습을 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이 법의학을 전공하겠냐"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편, 사회인권시스템이 잘 발달한 외국의 경우 지역마다 배정된 전담 법의학자들이 있으며 심리학과 결합한 프로파일링도 활발하다.

CSI드라마에서는 주검이 발견된 즉시 CSI 요원들이 달려가 활약한다. 이는 담당법의관이 지역마다 배치된 형태의 '전담검시제'를 실시하는 미국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5년 전부터 과학수사대가 현장에 직접 출동하지만 법의학자는 함께 동행할 수 없다. 우리나라 법의학에서 사체의 검시여부를 판단하는 주체는 검사이며 검사의 지시에 따라 법의학이 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를 '겸임검시제도'라 한다. 이 제도로 법의학지식이 없는 검사가 주검을 검시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어 부검여부를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법률적으로 규정된 검시제도가 없다.

/감수 :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황적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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