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링컨 대통령 리더십 비교>

 

노무현

링컨

인사 

정부와 청와대의  핵심포스트 대부분에 ‘386 세대’ 및 측근인사 임명

공화당내 반대세력들에게 관직 배분

정당과의 관계

민주당 분열, 열린우리당 탈당 등 당내분열

국민적 여론 환기시킴으로써 당내 지지 확대

언론과의 관계

‘앞으로 오보와의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등의 발언을 비롯한 언론과의 갈등

적대적 언론에 대해서도 여론을 읽기 위한 수단이라 인정

국민에 대한 태도

FTA, 이라크 파병 등 국민적 합의 없이 중대안 사안 추진.링컨

국민에 대한 끊임없는 설득. 여론이 성숙되기를 기다림.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후보들 중 리더십 분야에서 가장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연 노무현은 대통령감인가?’ ‘노무현에게는 정치적 리더십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노무현 후보는 이를 보완이라도 하려는 듯 대선 직전에 <노무협의 리더십 이야기>(노무현 지음, (2002) 행복한 책읽기)라는 책을 펴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리더십을 ‘모든 소스를 공개하며, 정보를 독점하지 않고, 공개된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여 조금씩 발전시키고 함께 이루어 가는 리더십’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자신의 리더십은 기존의 리더십과 다른 유형의 리더십이지 우려하듯이 리더십이 부재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조금 더 일찍 출간된 <노무현이 만난 링컨>(노무현 지음, (2001) 서울: 학고재)이라는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링컨의 지도력을 스스로 평가하는 대목이 있다. ‘강력한 지도력은 강권적 지도력이 아니다. 바로 대중의 신뢰와 민주적 절차에 뿌리박은 통합의 지도력이다.

또한 수평적이고 개방적이며 자율적인 지도력이다.’ 이와 같은 평가는 개방적이고 참여를 유도하는 노무현식의 리더십과 상통한다. 따라서 그는 성공한 리더십의 모델로서 링컨을 본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여러모로 링컨과 닮았다는 것을 강조한 것과 스스로 한국의 링컨이 되겠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 점에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존경하고 스스로 닮았다고 한 링컨의 리더십의 수행에 견주어서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의 리더십을 평가해 보는 것은 어떨까. 다양한 링컨 대통령의 전기가 있지만 최근 출간된 리처드 카워딘(Richard Carwardine) 의 저서 <통합의 리더 대통령 링컨>(2007; 북스타)은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된 상황 속에서 당내에서도 소수의 입지에 있었던 링컨이 어떻게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고,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책에서는 링컨의 리더십을 자신이 속했던 정당과의 관계, 언론과의 관계 그리고 국민(여론)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 세 가지 범주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과연 어느 정도로 링컨과 부합할까.

△ 대통령의 정당에 대한 태도

 링컨의 공화당에서의 입지는 집권 초기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당에서의 입지와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일리노이 출신의 아무런 배경이 없었던 링컨은 1860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공화당 내의 많은 당원들로부터 대통령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서 링컨이 택한 방법은 반대세력들에게 관직을 배분하는 것과 국민적 여론을 환기시켜 이를 통해 당내 지지를 확대시켜나가는 것이었다. 

 이 첫 번째 방법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링컨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링컨이 정부의 주요 보직에 당내 반대세력들을 임명하며 그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내고 결과적으로 당의 통합을 추구해간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386 세대’와 ‘노사모’로 표현되는 측근인사를 정부와 청와대의 핵심 포스트에 임명하였다.

심지어 학계에서 소신은 있으나 주류에 들지 못했던 소수파들을 권력의 핵심부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노무현의 대통령의 당선의 과정이 분명 민주적 절차를 통한 국민투표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의 정권창출과정을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라고 표현함으로서 인사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 방법은 노무현 대통령의 여론에 의존하는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링컨이 여론의 지지를 통해서 당내의 자신의 위상과 입지를 굳혀간 반면 노무현은 여론에 기대어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정당을 분열시켰다.노무현이 후에 이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듯이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에 의해서 분열되었고, 그 결과 열린 우리당이 탄생하였다. 정당의 이합집산이 난무한 한국적 정치상황에서는 탈당과 창당이 용서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택은 기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링컨과 같이 정당정치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링컨은 정당 내에서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정당을 과감하게 버리는 선택을 감행했다. 2004년 민주당을 탈당했던 전력이 있던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열린우리당이 분열의 수순을 밝고 있는 과정에서 또다시 탈당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탈당한 이후 정당은 분열의 수순에 들어갔다. 한편 그의 정당관은 2005년 열린 우리당이 수세에 몰리자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기한 것서도 알 수 있다. 거의 합당의 수준으로 이해되었던 대연정의 제안은 많은 논란을 낳았는데 이를 통해 과연 노무현 대통령이 정당정치의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게 한다.

△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태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 미국에는 <모닝 크로니클>, <네셔널 리퍼불리칸>, <스타> 등을 비롯하여 수 백 가지의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모두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신문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대통령에게 적대적인 언론도 있었다. 링컨은 자신에 대해 적대적인 언론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언론에 대해서는 여론을 읽기 위한 수단으로서 필요하다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태도는 링컨의 언론에 대한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노무현의 언론에 대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언론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여, 자신에게 호의적인 언론 편들어주기, 보수 언론과의 전쟁 선포에까지 이르렀다. 노무현 정권과 언론과의 껄끄러운 관계는 김대중 정부시기로까지 올라간다.

한국의 언론이 정권과 이러한 관계를 설정하게 된 데에는 한국 언론의 특수한 현실 즉 한국사회 만큼 언론이 막강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사회도 드물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공연히 ‘언론 때문에 못해먹겠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언론이 분명 비난받을 부분은 있을지언정 이것이 최고통치권자에 의한 규제와 탄압의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언론의 사회적 기능을 망각한 일종의 월권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보수 언론사인 조선, 중앙, 동아와의 관계는 집권 초기부터 논란거리였다. 한편 그와 대조되는 진보적인 한겨레와 일부 인터넷 신문과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 또한 자주 입방아에 올랐다. 노무현 정부와 강력한 친화력을 보였던 한겨레는 군사독재정권하의 어용신문과 유사한 권력 유착형 정권의 기관지로 변화했다는 오명까지 쓰면서 노무현 정권에 최대 지지자가 되었고, 인터넷 신문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기사를 때때로 독점하면서 기존의 언론사의 판도를 바꿀 만큼 성장할 수 있다.

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결국 대선이 있는 올해 초 전체 언론에 대한 규제로 나타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와 언론의 건강한 긴장감을 드높이기 위함이라는 구실로 기자실을 통폐합하고 취재원들과 기자들이 자유롭게 만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언론은 언론자유를 말살하는 일이라며 저항하였지만 이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은 강경하다.

△ 대통령의 국민(여론)에 대한 태도

   책에서 묘사되어 있듯이 링컨은 국민을 가장 두려워했고, 민의를 최대한 존중하였다. 링컨이 재임당시 미합중국은 연방통합과 노예해방으로 인해서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고, 남부의 독립 움직임도 있었다. 따라서 링컨의 입장에 대한 심각한 반대의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링컨은 당시 북부의 입장을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설득하였으며, 그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여론이 링컨의 지지로 돌아서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론이 성숙되기를 기다렸다는 점이다. 그는 결코 여론을 앞질러서 행동하지 않았다.

 민의가 가장 중요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링컨의 리더십 중에서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이 아닌가 싶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정치 하에서 여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론을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돌리는 방법에서 뛰어 났다. 그러나 링컨과 다른 점은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그 방법에서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5공 청문회’ 스타이다. 그는 5공 청문회에서 당시로서는 보기 어려웠던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화법과 행동을 보임으로서 많은 지지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스타일은 대통령이 된 이후 여러 가지 ‘깜짝쑈’와 ‘역발상’의 제안 (2007년 신년 벽두에 아무도 예상하고 있지 못한 4년 연임제의 개헌을 제안, 2005년 사전 논의 없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등으로 나타났다. 기존의 관행을 깨는 스타일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귄위를 탈피한 모습에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을 깨는 스타일은 결과적으로 여론을 앞질러서 행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례로 2004년 2월 통과된 한, 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은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부터 준비되어 왔던 것으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협상과 준비의 기간이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총선직전까지 늦춰 다분히 정치적 계산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라크 파병안 역시 그러하다.

이라크 파병안은 미국이 2002년 파병을 요청하였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방송, 신문 등에서 구체적인 토론을 하면서 이를 위한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노무현 정부는 이를 총선 바로 앞에서 통과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국민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의제화하지 않고, 총선 직전에 누가 보아도 다분히 선거용을 활용함으로써 야당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노무현 정권의 일차적인 선호가 국민에게 있는지 아니면 야당견제에 있는 것인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례는 지난 10월에 있었던 제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도 나타난다. 대선을 앞둔 시기에 갑작스럽게 제안된 남북정상회담은 그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을 찾기도 전에 대선 선거용이라는 비난을 얻기에 이르렀다.
 
△ 링컨을 존경했지만 닮지 못한 대통령, 노무현

지은주(평화연구소 연구교수)
체제와 정치형태에 따라 리더십의 유형은 달라질 수 있다. 그 중에서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라면 리더십의 핵심은 다양한 이해와 충돌이 존재하는 가운데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는 기술(art)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방식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제시한 리더십 유형 중 합리적-법적 리더십에 가까울 것이다. 링컨의 성공적인 리더십은 그 안에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당과 언론 그리고 국민과의 관계에서 링컨이 선택한 입장은 지나치리만큼 원칙적이었고,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의 눈에는 겸손한 것으로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기대 속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과반수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2년 반 이후의 5.31 지방선거에서는 대패하였는데 이는 정권 창출 후 2년 반 만에 민의가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아선 민심은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 ‘불안하다’고 표현한다.

검증받지 않은 ‘코드인사’, 잦은 분당과 탈당, 언론과의 끊임없는 갈등, 여론의 호도는 사회를 통합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분열과 반목을 가져오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좀 더 링컨의 통합의 리더쉽에 부합하는 정치를 했더라다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대통령 임기 말기 낮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지금, 그가 대통령 선거에 임할 당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리더십 부재론을 결과적으로 입증한 셈이 되었다.

지은주(평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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