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거리가 삶이고 사랑이고 희망이던 시절이 있었다. 운동이나 정치에 무관심하던 이들도 한반도 남녁에서 타올랐던 민주주의 불씨에 대한 기억의 의무감이나 부채의식에 강의실을 벗어나 교문 앞에서, 종로, 을지로, 명동의 한 구석에서 기꺼이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던 시절이 있었다.
 
5월의 파리 거리는 프랑스 현대사에서도 열정과 사랑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장소였고 역사적 전환점의 무대였다. 1871년 세계최초의 공산적 정부였던 꼬뮌이 피로 쓰러졌던 5월, 세계 대공황아래 독일, 이태리, 스페인에 파시즘이 등장했을 때 좌파연합 인민전선의 선거승리를 축하하던 1936년 5월, 신좌파의 탄생을 알린 1968년 5월의 바리게이트들, 1981년 5월 사회주의 대통령 탄생과 함께 한 거리축제들. 파리지엥들의 기억속에 5월 거리에 대한 새로운 기념비가 생길 것 같다. 2002년 5월 1일 150만명의 반극우파 시위.

1889년 파리에서 제2차 인터내셔날이 5월1일을 노동절로 정한 이래로 전통이 된 노동절시위의 참가자는 연평균 2-3만명, 반세계화나 노동시간 단축 등 최근 수년내의 민감한 사회적 이슈가 있을때에도 20∼30만명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극우파가 진출한 대선 결선투표를 앞둔 올 시위는 150만명이 참가했고 그 중심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 장소인 바스티유광장에서 시작된 시위에 나부끼던 깃발은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 트로츠키주의자, 각종 노조, 시민단체, 학생조직 등 다양했고 예술가들, 대중스타들까지 가세했다. 우파 정치가는 볼수 없었지만 우파적 성향의 시민단체나 정치와 상관없는 순수학생단체도 눈에 띄었다. 이 다양한 시위대의 주장은 반극우,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 민주주의, 그리고 공화정의 가치 수호로 통일되었다.

5월5일 대선 2차투표.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간주되던 70% 보다 훨씬 높은 82% 지지로 우파 시락은 상대 극우파 후보를 눌러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4월21일 1차투표 결과 발표 직후부터 파리와 지방 중소도시 거리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된 고등학생, 대학생들의 2주간 계속된 반극우파 시위와 이에 자극받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계, 노조, 시민단체들이 극우파를 막기 위해 시락을 공개지지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5월5일 이후 전면적인 정치토론과 시위를 일단락했다. 하지만 최근 4∼5년간 서서히 탈정치화되던 학생들은 다시금 정치색을 되찾았다. 이들은 6월 총선과, 총선이후 정부 정책에 적극적인 참여와 감시비판을 예고하고 있다. 97년 조기총선과 사회당 승리를 이끌어낸 것은 93년 총선으로 집권한 우파정부의 사회복지 후퇴에 대한 반발로 두달간 전개된 95년 겨울 노동자, 학생들의 총파업때문이 아니었던가?

학생들은 68년 이후 최대규모로 오월 거리를 장악하면서 민주주의와 사회적 보편가치의 마지막 보루가 학생임을 과시했다.

사랑, 학업, 취업 그 어떤 개인적 문제보다도 민주주의와 사회적 가치추구가 학생들의 영원한 관심사임을 2002년 파리의 오월거리는 증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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