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는 아주 연속적으로 빨리 두 개의 눈물을 흐르게 만든다. 처음 눈물은 잔디 위를 달리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라고 말한다. 두 번째 눈물은, 잔디 위를 달리는 아이들을 보며 모든 인류와 함께 감동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라고 말한다. 키치를 키치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두 번째 눈물이다.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불쌍한 아이를 보며 흘리는 눈물이 울고 있는 자신에게로 소급될 때 우리는 이것을 ‘이차적 눈물(the second tear)’이라 말한다. 마찬가지로 예술품을 감상할 때 사람들은 자주 작품 자체 보다 예술을 감상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에 젖어든다. 예술 사상의 비교적 새로운, 하지만 자주 오도되는 키치(kitsch)의 정확한 정의는 ‘이차적 눈물’이란 수사적 용어에 잘 내포돼 있다.
예술은 표현을 통한 심미적 활동이다. 문학은 그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하고 음악은 음악적 기호를 사용하고 회화는 선과 색을 사용한다. 예술의 창조와 감상은 이러한 수단과 그 수단이 불러오는 미적 쾌락에 집중돼야 한다. 하지만 키치는 감상자가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그 작품이 환기하는 표상에 집중할 때 발생한다.
예술품을 자신의 허영이나 감상을 위한 계기로 볼 경우, 감상자는 하나의 태도로서 키치를 가지게 된다. 이때 ‘키치적 작품’은 본래의 의미를 잃는다. 감상자가 심오하며 의미가 있다고 알려진 모든 예술품을 자신의 이차적 눈물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감상적이고 유치한 남자에게 부딪힌 고결한 여성이 이러한 운명을 겪는다. 남자는 이 여자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면서 나름대로의 이해와 해석을 통해 자기만의 정의 속에 여자를 가둔다. 결국 키치적 태도의 문제는 어떠한 가치와 고결성도 자신의 감상과 만족을 위한 계기로 전락시키는데 있다. 물론 이와 대조적인 키치적 태도도 있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예술품에 자기만의 그럴듯한 환상을 입혀 기만적 만족의 기회를 가지는 경우다.
키치는 ‘예술가가 감상자의 키치적 태도를 조장하거나 거기에 편승하려는 창작적 태도를 가지고 만든 예술품’에도 녹아있다. 이 경우 예술가는 작품 자체의 깊이와 완성도가 아닌 자신의 예술이 감상된다는 전제에 더 많이 집중한다. 즉 감상자들이 이차적 눈물을 흘리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통속 예술과는 다르다. 통속 예술은 솔직하다. 그러나 키치는 거드름을 피운다. 깊이와 의미의 결여를 감추고 존재하지 않는 예술성을 가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본래 거드름이란 지적 결여를 육체로 대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본성의 가장 가치 있고 매력적인 요소, 솔직함과 허심탄회함이 소멸된다. 가치 있는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작품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도, 해명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역량 안에서 무엇인가 ‘그럴 듯하게’ 창작된 자신의 소산, 그 자체로 조용히 만족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명에 적극적이었던 칸딘스키나 마르크조차도 키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키치적 실수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예술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바와 같이 ‘보여 지는 것(what should be shown)’이지 ‘말해지는 것(what can be said)’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무보상적, 무목적적인 보살핌이 아닌 다른 의도를 가질 때 키치적 부모가 되는 것처럼, 자기의 작품에 대해 이차적인 목적을 덧씌울 때 그는 키치 예술가가 된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이외에 다른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되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도 안 된다. 그것은 예술가 자신의 일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려다 만 사람들, 창조자가 되기보다는 창조물을 평가하고자 하는 비평가들의 일이다.
우리 삶은 본래 무의미와 허구다. 우리에게 가능한 출구는 거짓 의미 밖에 없다. 현대 예술에서 키치적인 경향은 이러한 거짓 의미를 계획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대인이 처한 절망을 드러내는 한 방편으로, 그리고 그 절망을 잊는 한 방편으로 키치적 태도를 가진다는 것이다. “한 마리의 토끼가 절망을 잊게 할 수는 없지만 토끼를 사냥하는 그 순간만은 절망을 잊을 수 있다” 키치가 절망에 대한 올바른 대응책은 아니지만 키치에 몰입해 있는 순간만큼은 무의미와 덧없음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흔히 키치적 작가로 알려져 있는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아트는 키치가 아니다. 그 예술들은 신(新)사실주의 작품들이다. 신(新)사실주의는 맥락 속에서 의미를 잃은 장면들을 그것만 따로 떼어내 제시함으로써 사물의 본래 의미를 환기시키는 예술이다. 일상적인 맥락 속 상투어구로 존재하는 캠벨 스프 깡통을 떼어내거나 만화의 한 장면을 떼어내 강조하는 순간, 존재하지 않던 의미들과 새로움이 생겨난다.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은 사실적인 한 장면을 다른 맥락에서 보기를 권할 뿐이다.
고전음악을 감상하는 감상자가 진정한 감동을 느낀다면 그것은 키치다. 그러나 다른 어떤 감상자가 감동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인식적 키치며 이 경우 키치 고유의 악덕은 벗게 된다. 과거의 모든 예술이 우리의 훈련과 현실 도피를 위해 이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키치다. 그것은 과거에 속한 그들의 예술이다. 고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예술은 현대 예술 밖에 없다. 그리고 자기 인식적 키치는 이러한 현대 예술의 한 경향이다.

 

조중걸
미국 예일대 서양예술사/수리철학 박사
현 캐나다 토론토대 시각예술대학 교수
<열정적 고전읽기>,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외 다수의 저작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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