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하게 솟은 아카시아 나무들이 우거져 산길은 깊숙한 그늘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오르자 지붕이 낮은 판잣집과 거뭇하게 변색된 슬레이트 지붕이 어깨를 맞대고 나무숲과 어우러져 있었다. 내가 찾는 집은 막다른 산길에서 반듯한 삼각산을 등지고 있었다. 좁은 공터에 차를 세우고 집 가까이 다가가자 다리가 짧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개가 사납게 덤벼들었다. 개가 짖는데도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기에 안으로 들어갔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어둑한 방안에서 얼굴이 뾰족하게 마른 노인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방구석에 누워 멍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처럼 낯을 가리는 노인이라던 승구의 말이 떠올랐다. 낯을 가리는 것보다 숫제 무심한 눈길은 나를 바라보는 것인지, 일말의 경계심을 품고 나의 행동을 두고보자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머리맡에 다가가 앉았다.   

"승구 친구입니다. 수요일마다 봉사하러 오는 친구있잖아요, 다리를 잘 못 쓰는……."

힘없이 축 처진 눈꼬리에 담긴 슴벅거리는 눈은 경계의 빛을 흘리며 내 어깨 뒤에 풍선처럼 매달려 자신을 굽어보는 어렴풋한 죽음의 형상을 더듬는 것 같았다. 죽음을 찾아 먼길을 달려온 사내로부터 죽음의 냄새를 맡았는지 그의 얼굴에 회환의 빛이 스쳤다. 다시 몇 마디를 건넸으나 그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 하든 그는 입을 굳게 다물 작정인 것 같았다. 그에게 나라는 낯선 인물이 익숙해지고 경계가 누그러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4,5학년 정도의 작은 키에 가냘픈 몸은 영락없이 아이의 체구였다. 그는 상반신을 숙이고 나를 바라보았는데 일순 그 얼굴에서 어슴푸레하지만 분명 창백한 미소가 잔잔하게 번졌다. 

"그림을 그린다는 그 분이신가요?"

그의 목소리는 목쉰 아이처럼 탁하면서 갸날펐다. 그는 노인이 아니라 조로증(早老症)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소년이었다. 세상을 깨닫기 전 이미 그는 노쇠해버렸고 삶을 생략한 채 일순 거대 죽음에 직면해 버렸다. 그는 삶을 통해 죽음을 직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삶을 조율해야 하는 무척 난해하고 지난한 처지에 놓여버렸다. 그렇게 허둥대다가 문득 생(生)을 압축시킨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승구는 오 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승구는 이후로 '생의 여유'를 베푼답시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자원봉사활동을 나갔다. 자신과 같은 장애자와 독거노인을 돕는 봉사활동이었다. 봉사활동 중에 승구는 낯을 가리는 노인을 만났다. 승구가 장애를 극복하고 생의 여유를 베푸는 동안 나는 채워지지 않는 궁핍한 예술혼에 휘둘려 줄곧 화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죽음을 소재로 한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다. 마침 인사동에 있는 제3아트 갤러리 개관 전시회에 초청을 받아 작품 몇 점과 함께 출품할 기회가 있어 이번 기회에 작품을 마무리하려고 단단히 작정을 했다. 욕심대로라면 페라리가 그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능가하는 불멸의 작품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러나 한 달이 넘도록 작품은 제목도 없이 ‘구성 NO.7’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그림은 반추상이었다. 나는 우선 결코 되물릴 수 없는 견고한 죽음의 세계를 상징할 양 대지에 반쯤 파묻힌 바위를 하나 상상해보았다. 바위와 대지를 암색으로 일체감 있게 표현하고 몸통이 바위 속에 파묻힌 채 간신히 얼굴만 돌출된 사자(死者)의 얼굴을 구상했다. 그 얼굴을 하느작거리는 흰옷을 입은 천상의 여인이 두 손으로 감싸고 비탄에 젖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그려낼 생각이었다. 검은 구름 일색인 하늘을 놓고 그 아래 어둡고 불에 타버려 몸통만 남은 앙상한 나무가 바위산에 드문드문 박혀있는 정경을 배경으로 했다. 나는 구성안대로 드로잉한 다음 몇 번이나 작품을 완성시키려고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도무지 사자의 얼굴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잠든 얼굴과 죽음이 덮인 얼굴, 그 미묘하면서도 심오한 차이를 그려낼 수가 없었다. 내 그림은 종종 죽음이 아닌 절망에 빠져든 얼굴을 그려댔고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그려 넣은, 사자의 얼굴을 향해 비쳐드는 가느다란 햇살의 영향 때문인가 해서 빛의 세기를 강하게 혹은 약하게 잡아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유감스럽게 나는 사자의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다. 냉정한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나는 미처 죽은 자의 얼굴을 그려내지 못했다. 몇 번의 데생과 지움을 반복하다 이젤을 밀쳐 두고 있던 중에 승구가 찾아왔고 그로부터 누구보다도 죽음 가까이 있다는 노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주말마다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소년을 찾아갔다. 처음에 데면데면 굴던 소년은 단지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의 방문을 반겼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모르게 흘리기도 했다. 모든 불행과 악을 가냘픈 몸 안에 압축시킨 것 같은 그의 몸은 쇠락할 대로 쇠락해 있었다. 영원히 성장을 멈춘 작은 키에 머리는 백발이 성성했고 이마엔 주름이 깊게 패였으며 버석거리는 얼굴 가죽은 지구의 강한 중력에 의해 당장 흘러내릴 것 같았다. 당뇨, 고혈압, 심장병 같은 노인성 질환이 그를 괴롭혔으며 낡은 스폰지 같은 폐에서는 끊임없이 곰팡이가 번식해 소년은 늘 쿨룩거리며 밭은기침을 해댔다. 이처럼 여러 합병증으로 인해 소년은 하루에도 수 십 알의 알약들을 삼켰다. 약 기운 때문에 그는 늘 졸거나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어둠침침한 방안의 한곳을 응시하기 일쑤였다. 정신적인 공황은 물론 육체적인 고통과 단조롭고 폐쇄된 생활은 그를 권태의 수렁에 빠지게했다. 빠른 세월과 권태라는 이 모순된 상황이 그를 사색적인 인간으로 만드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년은 종종 여느 노인처럼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방안을 거닐었다. 그는 뭔가에 골몰하면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방안을 빙빙 돌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일까, 그는 열세 살짜리 나이답지 않은 상상력과 사고력을 갖고 있었다. 육체의 나이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정신연령이지만 또래 소년들이 곧잘 갖는 호기심과 장난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의 주된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육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가역반응(不可逆反應)에 대한 지속적인 고찰이었다. 아이의 명랑함은 병적인 우울증에 눌려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조로증을 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급속히 진행되는 노화현상 따위는 주파수가 맞지 않는, 잡음투성이 라디오처럼 자신의 생체 시계와 외부의 물리학적인 시간이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어긋나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시간의 정체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연구하고 사색하는 일을 반복하다 평소 복용하는 약에 두통약을 추가했을 뿐 이렇다할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한번도 시간에 굴복한다거나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은 적이 없었다. 시간에 집착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지언정 소년은 의외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방에는 여러 잡다한 책들과 함께 <신세계>라는 표제가 붙은 화집 한 질이 놓여 있었다. 하드커버로 장정된 표지는 손때로 번들번들했고 책 모서리는 닳아 보푸라기가 일어 있었다. 화집을 펼치고 들여다보는 것은 소년의 주요일과였다. 나는 그가 천부적으로 아티스트의 기질을 타고났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이 살바도르 달리(Salvador Felipe Jacinto Dali)의 <기억의 지속>이라는 그림을 바라볼 때의 얼굴 표정을 지켜보노라면 그에겐 분명 숨길 수 없는 아티스트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소년은 <기억의 지속>이야말로 시간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시간에 대한 뒤틀린 인식과 인간의 위선을 낱낱이 드러낸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달리는 시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소년은 생각했던 것이다. 소년의 믿음에 나도 어느 정도 동감하는 바였다. 비단 달리 뿐만 아니라 수많은 화가들이 시간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3차원적 행위를 2차원적 평면에 그림자처럼 투영시킨 것이 바로 화가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달리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동면(冬眠)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기금을 제공했다는 사실마저 소년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어쩌면 동면에 집착한 달리이고 보면 소년이 믿듯이 시간의 실체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살바도르 달리를 아세요?"

소년에게서 노안(老眼)의 애수가 보였다. 열세 살짜리 소년의 해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노안 깊숙이 숨겨진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달리를 파시스트라고 한다면 그는 열렬한 파시즘 숭배자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대단한 독설가입니다. 재미있는 사람이지요. 자신을 지고한 돼지라 했어요. 돼지야말로 완전함의 상징이라면서 말입니다." 

소년의 얼굴 위로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어쩌면 그는 정말 돼지를 신격이 부여된 완전체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럴 땐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노인과 소년이 뒤범벅된 그에게서 나는 종종 노구 뒤에 감춰진 소년을 분리해냈다. 육체에 스며든 세월이 위선된 것이지 결코 그의 영혼마저 마모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소년이었다.  

사자(死者)를 그려내겠다던 열병은 막상 소년과 만나면서 잦아들었다. 열병의 압박이 잠깐 수그러들었을 뿐인지, 소년에 대한 애착으로 열망이 변질된 것인지 나조차 알 수가 없었다. 영혼이 생동하는 엄연한 인간을 만나면서 사자의 얼굴을 그려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죽음은 소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언제든 소년을 덮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소년 곁에 있으면 시간의 화살이 소년의 몸통을 꿰뚫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언젠가 죽음으로 뒤덮일 소년의 얼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는 본의 아니게 호스피스 역할을 맡게 되었고, 소년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노구에 파묻힌 소년의 영혼을 발굴하는 고상한 작업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추레하게 늙은 노구가 벗겨지며 여느 소년을 만나는 것 같은 애틋함이 생겨났다. 그것이 너절한 노구가 드리운 그림자일지라도 나는 노구 속에 투영된 변색되지 않는 초롱초롱한 소년을 만났던 것이었다. 언젠가는 주검이 아닌 아름다운 복숭아 빛 피부와 촉촉한 눈빛과 얼음같이 새하얀 치아를 가진 소년을 만나게 될 것만 같았다.

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상륙했다. 곳곳에서 물난리와 산사태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산 속에 홀로 있는 소년이 걱정이 되어 우중을 뚫고 소년에게 달려갔다. 산길 입구로 향하는 도로와 연결된 다리가 불어난 계곡 물에 잠겨 내를 건널 수가 없었다. 나는 새로운 다리를 찾기 위해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마침 건너편 냇가에 있던 아카시아 나무가 태풍에 쓰러지면서 자연스레 다리가 된 곳을 발견했다. 나무뿌리를 드러내고 쓰러진 아카시아나무는 반쯤 물에 잠겨 흙탕물에 금방이라도 휩쓸릴 것 같았다. 나는 냇물로 뛰어들어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붙들었다. 거센 물살에 밀려 흔들거리는 나무줄기를 더듬어 밟아가며 조금씩 내를 건넜다. 발을 헛디디면 물에 휩쓸릴 것 같아 건너는 내내 등줄기가 뜨끔해졌다. 거센 물살에 휩쓸리는 흙과 돌들이 뒤엉킨 냇물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혼탁한 세계였다. 산을 오르는 동안 산비탈이 무너져 뻘건 흙이 흉측하게 계곡 아래로 길게 흘러내린 것이 보였다.

다행히 소년이 살고 있는 집은 그림처럼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소년은 평소에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던 올빼미 모양의 중국제 탁상시계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는 ‘3’ 에 있던 시계 바늘을 빙글, ‘7’ 에 돌려놓고 후줄근하게 젖어 있는 내게 들이밀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3시입니다."

소년은 윗입술을 빨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년은 마치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세계 표준 시(時)라는 인류의 약속에 불과한 시간이 산 속에 버려진 조로증 환자에게조차 미친다는 사실이 다소 불합리한 게 아니냐고, 단 둘만의 약속으로 새로운 시간 체계를 창조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열세 살짜리 소년은 이처럼 자신의 연구 성과를 과신해 가끔씩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3시는 아니죠?"

"물론이지요, 두 나라 사이에는 대서양이라는 널따란 시차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흐름은  똑같다고 볼 수 있지요. 남아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시간의 양은 같은 것처럼."

"흐름이라뇨, 시간이란 게 실체가 있는 건가요?"

그것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시간이 인위적인 척도에 불과하다면 시간의 권위는 야담으로 전락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나 뚜렷이 인식하고 있는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자니 물리학적인 시간의 운동성을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있을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통합된 에너지, 질량과 굽어진 시공간 방정식을 발표했을 때, 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생소한 이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새로운 발견에는 그에 걸맞은 언어가 필요했는데 언어는 아직 창조되지 않았던 것이다. 소년은 당시 학자들처럼 의혹의 눈초리를 감추질 못했다.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물리학적 이론으론 가능하지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천천히 턱을 끄덕이는 소년의 얼굴이 무너질 듯 창백해 보였다. 이제 겨우 원숭이를 벗어난 우리 인간에게 빛의 속도라니, 더 이상 소년을 절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소년에게 희망을 건네고 싶었다. 그림이야말로 3차원적 행위를 2차원의 개방된 평면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라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시멘트 속에 묻힌 것처럼 단단하게 고정된 시간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고 말했다.

"가령 달리의 <보이지 않는 잠자는 여인, 말, 사자등> 이라는 작품을 보면 구형체를 지나는 선은 변형을 거쳐 곧장 직선으로 뻗어갑니다. 여기서 a에서 b로 이르는 선이야말로 화가가 그 구간을 직선으로 팔을 움직였다는 명확한 증명이겠지요. 말하자면 화가의 3차원적 행위가 2차원적 평면으로 옮겨왔다는 겁니다. 그 와중에 시간은 광폭한 세월이 흘렀어도 일 억 년 전의 투명한 호박(琥珀)에 갇힌 원시호리벌처럼 도망갈 틈을 잃어버리는 거지요. 그 순간에 달리의 눈은 꼼짝없이 선을 응시했을 것이고, 그의 뇌도 선을 그리는데 온통 집중했을 것이며 그의 심장은 팔과 눈, 뇌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피를 뿜어댔을 테지요.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 자신의 행위를 농축 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한정 소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달리의 정신세계의 부분이랄 수 있는 색면구조, 배치의 변화, 대비관계, 상징 등과 함께 견고한 화면구조를 이루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탄생하게 되어 달리의 행위는 시간의 틀을 깨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화집에 눈을 고정시킨 소년의 눈이 반짝 빛을 내뿜으며 거친 심호흡으로 가느다란 가슴이 들썩였다. 주름투성이 얼굴에 연필로 그은 듯한 마른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어느 새 그의 손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내겐 별로 시간이 없어요."

"아티스트란… 드로잉이라든가, 어떤 예술적 안목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열정 아니겠습니까?"

소년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너울거렸다.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한결 기분이 나아지면서도 가슴 깊숙이 묵직한 납덩이가 가라앉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은 끝내 떨칠 수가 없었다. 소년에 비해 내 욕망은 까닭 없이 무겁고 음침했다. 


나는 소년에게 무엇을 제안할까 머리를 싸매고 며칠간 궁리했다. 

하루가 다르게 소년의 몸은 쇠약해지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예술적 기교는 둘째치고 최소한의 육체적인 힘이 바탕이 되어야 했다.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나는 드립페인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뿌리기작업‘을 꺼냈다. 그것이라면 소년도 거뜬히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아, 잭슨 폴록!"

소년 자신도 나처럼 이리저리 궁리를 한 듯했다. 내가 '뿌리기작업'하고 말을 꺼내자마자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화가의 이름을 외쳤다. 나는 너무 많은 터부를 소년에게 두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가 머리를 들었다. 정말 소년을 소년이라 정당하게 부를 수 있을까? 소년이란 시간과 마찬가지로 잘 포장된 억압적인 개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소년은 마른침을 발라가며 화집에서 잭슨 폴록의 작품들을 찾아 황홀경에 빠진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증폭된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잭슨 폴록의 작품이 새로운 것은 아닐텐데 막상 소년 스스로 뿌리기작업을 한다고 생각하자 달덩이 같은 심미안이 떠올랐다. 동시에 생존본능과 결합해 치미는 창작욕구가 내가 힘들게 보듬은 무조건적인 열망과 더불어 형언키 어려운 동질감이 형성되었다.

나는 작업을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방안에 놓인 잡다한 것들을 들어내고 방바닥에 신문지를 깐 다음 아트지를 펼쳤다. 물감이 튈 것을 대비해 벽을 둘러가며 신문지를 붙여 놓았다. 내가 물감을 개는 동안 소년은 방 귀퉁이에 서서 팔짱을 낀 채 펼쳐진 아트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나름대로 구상을 잡는 모양이었다. 힘들때마다 화집을 들여다보며 거칠게나마 다듬은 예술적 안목이 그의 눈가에 빛났다. 그는 정말 고독한 아티스트처럼 보였다. 

준비가 끝나고 소년에게 붓을 건네자 소년은 손을 저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물감과 접촉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몸을 온통 물감과 뒤섞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먼저 노란색 물감통을 들고 아트지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집도 직전의 의사처럼 긴장된 엄숙한 모습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고 길고 예리한 촉수 같은 눈빛을 뻗어 아트지 위에 원을 그렸다. 마치 먹이를 찾는 광야의 표범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닥에 깔린 아트지를 세세히 훑었다. 잠시 후, 소년은 아트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물감에 천천히 손을 담갔다. 소년에게서 이전의 초라한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은 빛났으며 걸음은 활기차고 신중했다. 호흡은 가빴고 두 눈은 광채를 뿜다 못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소년은 물감을 한 움큼 쥐고 농부가 비료를 뿌릴 때처럼 반원을 그리며 아트지 위로 물감을 뿌렸다. 노란 물감이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그가 그린 반원의 궤적을 확장시켜 아트지와 충돌하면서 튀어 올랐다. 불규칙과 의외의 순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우주의 생성과도 같은 극적인 장면이 일어났다. 물감은 조금도 주저치 않고 흰 종이 위로 단도처럼 내리 꽂히며 몰아치다 밀려가고, 산산이 부서지는 도자기같이 눈부신 파편을 만들며 아트지 위로 거미줄마냥 방사선을 뻗치는 것이었다. 

소년은 춤을 추는 무희 같았다. 부드럽게 관절을 꺾고 사뿐사뿐 동선을 그리며 스치듯 종이 위에서 발을 구르다 느닷없이 몸을 돌리며 허공에 대고 팔을 휘젓거나 긁어댔다. 물감의 색을 바꿔가며 소년이 움직일 때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선들의 급작스런 형성과 흘러내림, 급격한 공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생성된 선은 모아지고 엉키며 갖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형체로 탈바꿈했다가 어느새 애초 선이 가졌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시 무수히 나뉜 공간을 드러냈다. 작은 새에게 하늘이 절대적인 공간이듯 아트지는 각각의 미세한 물감입자에게 있어선 전 우주였다. 물감이 튄 소년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기도 하고 넋 나간 표정이 되었다가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의 온몸은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으로 범벅이 되어 흡사 귀신처럼 보였다. 나는 그 때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황금빛 반구를 보았다. 황금빛 광채가 소년의 주위를 감싸고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빛이 아니라 황금빛 비늘을 가진 이름 모를 물고기 떼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황금빛 물고기 떼가 소년의 주위를 맴돌면서 끊임없이 소년과 부딪뜨리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시간의 정체였다.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소년을 갉아 댔다. 그러나 소년이 팔을 휘저으며 물감을 뿌려댈 때마다 황금 물고기들은 물감 속에 갇혀 종이 위로 널브러지며 발버둥을 쳤다.

“여기 좀 봐요."

나는 여전히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씨근거리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주름진 얼굴에서 물감과 땀이 범벅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얼굴을 닦으려하자 소년은 내 손을 슬쩍 피하면서 종이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우리가 많을수록>이에요."

나는 복잡하게 뒤엉킨 선들과 흐트러진 점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정말 그곳엔 아메바와 해파리같이 생긴 형태가 부드러운 해저 속에서 유유히 유영을 하고 있었다. 나비 떼 같은 모양의 형체는 물에 뜬 낙엽처럼 불안하게 미지를 상징하는 듯한 수평선을 향하여 대각선으로 일렬종대를 지어 몰려가고 있었고 하늘은 어두운 빛깔의 운무로 가득해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소년이 흩뿌린 물감은 의외로 정교하고 날카로웠다. 그만큼 그 스스로 황당하고 고통의 깊이가 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날 이후 소년은 뿌리기 작업을 몇 번 더 했다. 하지만 소년은 작업을 중단했다. 추측컨대 뿌리기 작업만으로는 그가 이루고자하는 무언가를 이룰 수 없는 것 같았다. 또 한가지 덧붙인다면 점점 쇠약해지는 그의 육체 때문이었다. 소년은 몇 시간에 걸쳐서 뿌리기작업을 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극심한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년은 아무리해도 폴록만한 구성과 깊숙이 감춰진 예술성을 끄집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내게 불평을 터트렸다.

"이 따위 것들은 모두 흉내내기에 불과해요."

그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뭔가를 원했다. 나는 화집을 꺼내 작품들을 보면서 소년이 만족할 수 있는, 보다 독창적인 작업에 대해 연구를 했다. 그러나 대개의 것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익힌 드로잉과 고도의 예술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또, 그 와중에 독창성을 지닌 것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좀더 방법을 찾아보겠노라고 소년을 위로하고 슬쩍 물러나 버렸다. 

내가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소년의 삶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때론 소년에게 경도(傾倒)된 내 일상이 오히려 왜곡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소재로 한 ‘구성 NO.7’은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미지의 장막에 가린 사자의 얼굴은 끈덕지게 나를 붙들고, 내 뇌리를 차지하곤 했는데 종종 말하고, 고뇌하고 방안을 슬슬 거니는 소년의 얼굴이 사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덤벼대는 바람에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언제 한번은 소년이 잠든 사이 그의 얼굴을 스케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주름투성이의 잠든 얼굴은 사자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고, 고뇌를 잊고 잠든 경직된 얼굴에 불과했다. 그것도 다분히 내 감정이 투사된 엄연한 산 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얼마동안 소년에게 가지 못했다. 개인전을 준비하는 대학 선배의 부탁을 받고 일주일 동안 갤러리를 쫓아다녔다. 오랜만에 찾아갔을 때 소년은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물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했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운명을 다분히 관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내가 몹시 못마땅한 듯했다. 그는 몹시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에게 절망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워 보였다. 그에게 절망이란 내가 심어준 환상이 부패되면서 풍기는 악취였다.   

“당신은… 적어도 당신은 다를 줄 알았어요!"

소년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순간적으로 기침을 쏟아내느라 대화를 잇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났다. 

“이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아티스트는 어쩌구요?"

“난, 단지 당신을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뇨, 당신은 여기서 끝내지 않아요. 나는 이미 당신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셈이라구요. 난 처음부터 당신이 누굴 동정해서 먼길을 달려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괜히 동정하는 척하지 말아요. 자, 이젠 어쩔 셈이죠?"

마치 죽음이 우리의 삶 첫 부분부터 놓여져 있듯이 우리는 정해진 수순대로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다. 그렇지만 소년이 이렇게 도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좀 의외였다. 나는 그가 소년답게 세속적인 티가 한 점 깃들이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었으면 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열세 살 짜리 소년의 맑은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위대한 예술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을 정복하고야 마는 나약한 인간의 승리,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는 새로운 시각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자의 얼굴은 단순한 사유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다니 뜻밖이군요."

우리의 관계는 종착으로 치닫고 있었다. 소년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관계라면 더 이상의 만남은 무의미했다. 시무룩한 내 얼굴 표정을 보고 소년은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화가 났다면 미안해요. 당신과 싸울 마음은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그 위선이 구역질났고 또 당신이야말로 나를 이 지경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믿었기 때문이에요. 신도 때론 믿음이 강한 인간에게는 자비를 베푼다고 하잖아요."

물론 소년이 소년답지 않게 늙어 죽는 것은 유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마땅했다. 소년이 시간에 의해 서서히 살해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나는 어쩌면 방법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세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은 어쩔 수가 없다 해도 최소한 소년이 시간에 치어 죽는 일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감히 내가 신의 영역을 넘볼 수가 있을까? 내게 주어진 이 비극적인 숙명에서 조금이라도 발을 빼고 싶은 심정을 측은한 눈길에 담아 소년을 건너보았다. 소년은 독심술로 영혼을 들여다보듯 내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지긋지긋한 시간과 그것에 결부된 죽음이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시에 위대한 아티스트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방법. 그걸 찾아야 해요."

“그건 이미 잭슨 폴록의 뿌리기 작업으로 확인했지 않습니까?"

“하지만 보세요. 내 몸뚱아리를 보라구요. 나는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어요. 변한 건 없어요. 변하길 원해요. 모든 것이 몽땅 변하길 원한다구요. 그 방법을, 당신은 잘 알고 있잖아요. 이 나이에 늙어 죽는다는 것은 너무 끔찍해요"

소년은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백발이 한 움큼 빠져버린 텅 빈 정수리가 화인처럼 내 가슴에 닿았다. 순간 소년이라는 환영이 달아난 자리에 몹시 초췌하게 늙고 몸이 구부정한 노인이 서있었다. 그는 얼마 안 가서 미동조차 못 하고 숨만 고르는 식물인간이 될 것이다. 죽음의 질긴 망이 그를 단단히 결박을 하고 있었고, 시간이라는 황금 물고기 떼가 그의 몸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래,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나는 실토를 하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내 얼굴이 축소된, 내 모습이 어른거리는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게 뭐죠?"

소년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창틀에 놓인 시계는 시간을 끊임없이 소모하며 그 소모량을 우리에게 지루할 만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을 지켜본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나는 시계를 집어 벽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플라스틱 시계는 벽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 시계바늘, 그리고 자잘한 부속품과 파편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년은 이미 내 행동과 시선의 궤적을 부지런히 쫓고 있었다. 흡사 마약중독자가 필사적으로 약을 찾는 것 같은 광기가 눈에 서려 있었다. 소년은 방바닥에 떨어진 시계바늘을 주워들고는 미소를 지으며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활기차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퍼포먼스와 보디아트, 뿌리기 작업의 절묘한 결합!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근원인 육체를 백일하에 드러내고야 마는 위대한 예술의 절대적 가치! 하하, 그래요. 나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죠. 정말, 정말 멋진 생각이에요!"

소년은 울컥 달려들어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백열전구처럼 작은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소년의 두개골은 바짝 야위어 있었다. 죽음의 덫에 걸린 것은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사자의 얼굴에 미혹(迷惑)한 것도, 쉽사리 소년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일찌감치 운명의 가혹한 덫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틀 후 새벽에 나는 소년을 차에 태우고 침울한 골짜기를 빠져 나왔다. 집은 곧 숲과 어둠 속에 파묻혀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갔다. 담요에 둘둘 말려 두 눈만 밖으로 내놓은 소년은 산중 추위로 경직된 몸을 풀기 위해 앞뒤로 몸을 천천히 흔들며 헤드라이트 불빛에 드러나는 전방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안색이 창백했다. 어제까지의 들뜬 모습은 간 곳 없이 침착했다. 그도 나처럼 잠을 설쳤는지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염증으로 부어오른 잇몸에서 배어 나온 피가 입가에 물려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 소년과 나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희붐하게 동편이 터지고 있었다. 진한 코발트 빛 대기가 조용히 만물을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 천천히 어루만져댔다. 언덕의 윤곽이 검은 먹줄로 그은 듯 뚜렷해 보였다. 검은 항아리가 깨지면서 푸른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하늘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나는 사방 십 미터는 족히 되는 흰 무명천을 아파트 화단 아래 펼쳐 놓았다. 바람이 일진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천 모서리마다 빨간 벽돌로 눌러 놓았다. 준비는 간단했다. 더 이상의 준비물은 필요하지 않았다. 햇살이 대지와 건물 지붕 위로 길게 뻗치기 시작했다. 소년은 고개를 살풋 들어 고운 가을 하늘과 아파트 옥상 모서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소년은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며 말했다. 바람이 분다 해도, 그의 몸이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그는 정확하게 공간을 찢어 시간을 정지시킬 것이다, 그럴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나는 아파트 현관 입구까지 소년과 나란히 걸어갔다. 소년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앙상한 손을 쥐고 몇 번 가볍게 흔든 후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소년은 돌아서며 말했다.

"이젠 죽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겠군요."

달리는 수염을 꼬며 입버릇처럼 동면을 통해 죽음을 우스갯거리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나 달리는 과학의 힘을 빌린 동면에 들어가지 못 하고 1989년에 죽었다. 죽음은 기인 살바도르 달리를 여지없이 포크로 꿰어 시식해 버렸던 것이다.

소년은 엘리베이터를 향해서 걸어갔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둥근 어깨를 가진 소년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철부지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의 심장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 이, 이봐!"

나는 고통에 못 이겨 절규하는 짐승처럼 그를 불렀다. 소년은 뒤를 돌아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든가, 생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이미 시간의 모진 굴레에서 벗어난 아늑한 평화로움 위에 아티스트의 자부심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아무 말도 못하자 실없는 게 아니냐고,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고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여린 잔영마저도 서서히 아침 햇살에 녹는 어둠처럼 사라져버렸다. 

캔버스로 사용 될 천은 언덕 위에서 사선으로 비껴들기 시작하는 아침 햇살을 반사시키며 하얗게 빛났다. 나는 천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아파트 옥상 위로 소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소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아침 찬바람이 스쳤다. 보이지 않는 바람은 천공(天空)에 매달린 대기를 살짝 흔들고는 뿔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파트 아래 도로에서는 시내를 지그재그로 가로지른 버스가 넓적한 지붕에 묵은 먼지를 잔뜩 이고 비탈진 도로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ㄷ'자형 아파트 귀퉁이 현관에서는 검은 정장을 입은 중년 여인이 아파트 광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나오다 흘깃 나를 바라보았다. 통통하게 살이 찐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집하장에서 뛰어 나왔으며 곧이어 시간이 멈춘 듯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의 적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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