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읽은 본격 저작물은 세계사 전집 가운데 19세기 부분의 권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던 그 책에 대해 지금은 구성은커녕 제목도, 출판사항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1814년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고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는 순간을 묘사한 장면만은 잊지 않고 있다. 루이 18세가 베르사유 궁에 들어가기 위해 마차에서 내리는 장면이었는데 그 표현이 너무나 생생했다. 세계사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방식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두고두고 생각날 정도로 그 묘사에 마음이 끌렸다. 아무리 딱딱하고 복잡한 내용이라도 서술과 편집의 방식을 달리하면 독자를 흡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때 깨달았는지 모른다.

최근 읽은 <역사의 원전>은 그 때의 그 기분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책이다. 독자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하는 방식이 일반 역사서나 이론서와 전혀 달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 책은 역사의 목격자들이 남긴 현장의 기록들을 제시하고 간단한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2500년 세계사의 흐름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편지, 일기, 보고서는 물론 신문과 잡지의 기사 등 갖가지 글들을 사용해 독자들이 역사의 흐름을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전선에 도착한 지 열흘가량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총알에 맞는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며 자세히 묘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페인 내전 때인 1937년 5월 20일, <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인 조지 오웰(본명 에릭 블래어)은 우에스카 부근에서 총상을 입고 이런 글을 썼다. 그는 스페인 내전 때 공화파 지지의 의용군에 참여했으나, 공화파 안에서 내내전(內內戰)이 벌어지는 추악한 상황을 경험했다. 이 글은 그 직후 개인적 경험과 고뇌를 적어낸 것인데, 이 글을 통하여 스페인 내전이 세계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매우 생생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책의 원제는 <역사의 목격자(Eyewitness)>였다고 하는데, 1987년 영국 페이버 총서에 <르포르타주 선집(The Faber Book of Reportage)>이란 제목으로 수록되기도 했다. 저자인 존 캐리(John Carey)는 옥스퍼드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비평가와 방송인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페이버 총서를 간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다른 저서인 <지식의 원전(이광렬 옮김, 바다출판사, 2007)>도 국내에 번역돼 소개된 바 있다.

문학의 ‘보고의 기능’을 대단히 중시하는 필자는 고전문학이 지닌 보고의 기능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일이 있다. 또한 막연하나마 우리 역사를 원전 중심으로 재구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최근 필자가 집필한 <간찰>이나 <산문기행>은 각각 편지글과 산수 유람기를 통해서 우리나라 지성사의 한 단면을 서술한 것이므로, 원전 중심의 재구성이라는 방식에서 이 책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하지만 <역사의 원전>은 해설을 극소화하고 장르를 다양화했다는 점에서 필자의 방식과 다르다. 그래서 이 책을 볼 때마다 의표를 찔린 기분, 선수를 빼앗긴 기분마저 들곤 한다.

국내에 소개된 번역본은 각 편마다 본래의 짧은 해설 이외에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낯선 사실들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고, 원래의 사료를 비판적으로 해석한 해설을 덧붙였다. 외국 서적의 번역물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번역의 한 범례를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바다출판사, 2006)

심경호(문과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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