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문과대 교수 · 철학과
‘짝퉁’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제조기술이 발달해 짝퉁과 정품을 구별하는 일이 쉽지 않다. 짝퉁은 시계나 핸드백을 파는 시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품이 전시된 갤러리에도 존재하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인간사회’에도 존재한다. 짝퉁에 속지 않으려면 먼저 정품의 특징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짝퉁과 정품의 차이를 판별해낼 수 있는 밝은 눈을 갖춰야 한다.


이유선 선생의 <실용주의>는 세간에 회자되는 ‘짝퉁 실용주의’를 ‘정품 실용주의’와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지침서다. 선생은 책에서 퍼스 · 듀이 · 제임스 등이 제창한 실용주의(pragmatism)의 철학적 특징을 소개하고, 정치인들이 즐겨 내세우는 ‘실용주의’라는 구호가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위선적이고 속물적이라는 것을 명석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문고본 형태의 가벼운 분량에 점심 한 끼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어서, 등하교 시간에 전철 안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철학’으로서 실용주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특징을 지닌다. 첫째, 실용주의는 ‘인간’을 파악할 때 진화론적 관점을 견지한다. 인간에게 초역사적이고 보편적인 본성이 있다는 관점을 거부하고, 인간은 오랜 역사의 과정을 거쳐 진화해온 다양한 생물종 중의 하나라고 간주한다. 둘째, 인간이 지닌 ‘지식’을 이해할 때 본질주의적 진리관을 거부하고 역사주의적 관점을 견지한다. ‘지식’과 관련해 실용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어떤 지식이 ‘참’인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어떤 지식이 주어진 상황에서 ‘유용’한가 하는 점이다. 셋째, 실용주의자들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에 현실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이 현실의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세속적 속물주의자들이라고 예단할 필요는 없다. 이들이 중시하는 ‘현실’이란 초월적인 이념이나 교조적인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 오로지 돈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속물주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넷째, 실용주의는 다원주의를 견지한다.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은 없기 때문에, 다양한 신념과 가치관을 인정하고 그들 사이의 대화와 소통을 추구한다.


저자에 의하면 “정치적 구호로서의 실용주의는 탐욕스런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개고기 상점에 자본주의의 떡고물을 챙기기 위하여 내걸고 있는 양머리에 불과하다. 이들이 말하는 ‘실용’은 신자유주의의 무자비한 경쟁을 미화하는 단어이며, 경쟁에 뒤진 낙오자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무자비한 칼날이다.”(19쪽)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실용주의’라는 구호는 이윤추구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식의 천박한 속물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곤 한다. 이러한 구호는 본래적 의미의 실용주의라기보다, 차라리 ‘무원칙적 실리주의’ 또는 ‘탈도덕적 속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실용주의는 본질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에 정치체제 안의 다양한 구성원간 대화와 소통, 그리고 연대와 조화를 통해 비로소 효과적이고 시의적절한 해결책을 도출해낼 수 있게 된다. 만약 실용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대화와 소통 그리고 연대와 조화를 소홀히 하는 순간, ‘실용주의’는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야수적 속물주의’로 변모하거나 도덕과 원칙을 무시하는 ‘무원칙적 실리주의’로 전락하게 된다. ‘짝퉁 실용주의’의 위해성(危害性)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정품 실용주의’의 특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 이유선 저 (살림출판사, 2008년 4월)

이승환/ 문과대 교수 ·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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