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은 오랫동안 존재한 우리의 전통 신앙 중 하나지만 외래 종교의 유입과 미신타파 운동 등에 의해 경시되고 편견을 받아왔다. 그렇지만 무속의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모든 고통을 감수하며 세상의 고통마저 끌어안고 살아간다. 이들의 삶을 보기위해 강화도에 있는 만신 김금화씨를 찾았다.

                               (사진=박지선 기자)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선생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고 묻자 ‘만신’과 ‘무당’이라 부르라했다. “만신은 한자로 滿(찰 만)자에 神(귀신 신)자를 써. 어떤 사람은 일만 만자라고도 하는데,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찰 만자를 쓰시더라고. 무당의 존칭을 뜻하는 거지. 무당(巫堂)의 巫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둥이 하늘과 땅에 맞닿아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무당은 하늘의 말을 땅에, 땅의 말을 하늘에 전하는 매개자인 거지. 우리는 천지신명, 그러니까 땅의 모든 자연신과 조상신을 모셔”

김 씨는 어린 시절 언젠가부터 길을 가다가 이유 없이 멈춰서고 어떨 때는 몸이 붕 뜨는 것처럼 나른해 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쫒기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초조했으며 자신도 모르게 나무나 돌을 보고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 심한 무병을 앓은 뒤인 17살이 돼서 무당이었던 외할머니로부터 내림굿을 받았다. “무병을 앓는 이들은 신이 선택한 사람들이야. 신이 접한 사람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 신내림을 거부하면 악몽에 시달리고 꼬챙이처럼 말라버려. 결국 내가 아닌 상태가 되는 거야. 운명을 거역하는 사람도 많지만 인정하지 않는 한 우울증, 정신분열, 하혈, 병명을 알 수 없는 병 등 무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어”

내림굿을 받는다고 곧바로 무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당이 되기 위해선 힘든 교육의 기간을 견뎌내야 했다. 김 씨는 누구보다도 혹독하게 이 기간을 거쳤다. 김 씨는 이때가 시집살이보다도 더 매서웠다고 했다. 김 씨 역시 지금은 교육자가 돼 무속인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 지금까지 김 씨의 교육을 거쳐 무당이 된 사람들은 60여명. 현재는 15명 정도가 김 씨를 신어머니로 모시고 무당 교육을 받고 있다. “무당교육에서는 인성교육이 가장 필요해. 정신문화를 가진 사람을 길러내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무당 교육 기간은 최소 10년인데 이 기간 동안 굿과 상차림 등 무당이 되기 위한 것들을 배운다. 하나하나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깨 너머로 배워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김 씨의 제자들 중엔 현재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작년 12월엔 독일인인 안드레아 칼프씨가 내림굿을 받기도 했다. 안드레아 씨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예지력으로 마녀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 작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샤먼대회를 통해 알게 된 김 씨의 인생 이야기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고, 결국 한국으로 와 김 씨에게 내림굿을 받았다고 한다.

김 씨에게 무속인으로서 가장 힘들었을 때를 묻자 ‘새마을 운동’ 때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미신타파운동이 한창이었기에 김 씨와 같은 무당들은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들은 우리를 죄인인 마냥 취급했어. 굿을 하고 있으면 경찰들이 들이닥쳐 막 잡아가 버려. 그러면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사정하고, 시말서 쓰면 겨우 나올 수 있었지. 하지만 굿은 무당의 운명이고, 사람들이 찾으면 굿을 할 수 밖에 없는 것도 운명이니까. 또다시 굿을 하다 잡히고, 시말서를 쓰고 풀려나가고를 반복 했어”

반면 김 씨에게는 1982년 한미수교 백주년 기념으로 미국에서 굿을 했던 것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처음엔 어려움도 많았다. 굿을 한다는 것에 대해 주최 측에선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고 태도도 냉랭했다. 하지만 김 씨의 열성적인 공연은 6000여 명의 관객을 감동시켰으며, 보름동안의 체류 계획이 3개월로 연장돼 미국 전역을 돌며 공연하게 됐다.

이후 김 씨는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2호 지정됐으며, 1995년에는 호암아트홀에서 한중수교 3주년 기념공연을 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서울대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굿 판을 벌였는데 ‘병원치료가 곤란한 환자들에게 전통굿을 통해 현대문명에선 이해될 수 없는 치료를 하였음’에 감사하는 감사패를 병원 측으로부터 받기도 했다. 또한 2000년부터 시작한 서해안 풍어제를 주관하고 있다.

김 씨는 당당히 자신이 ‘종교인’이라 말했다. “무속은 엄연한 종교야. 불교에 스님이 있고 교회에 목사님이 있는 것 같이 우리도 성직자고 종교지. 예전엔 태애교라고 불렀었는데 외래 종교가 들어오면서 살아남으려고 하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또한 김 씨는 무당의 역할로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와 심리치료사, 화해자를 꼽았다. “우리는 화해자와 치료사의 역할도 함께 해. 정신적으로 힘들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달래주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 지금 하는 일에 난 만족하고 있지. 행복하고. 남을 도울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는 것에 감사해. 만신들은 남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많은 것을 누릴 수 없고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지. 하지만 모두를 끌어안고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자 운명이야.”

김 씨는 매일 기도한다고 말했다. 하늘과 땅의 신, 해와 별, 달의 신 등 모든 자연신과 우리의 조상께.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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