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퀴즈 하나를 맞춰보자. 다음의 여러 증세를 보이는 사람은? 자기들끼리만 노닥거리고 대중과 단절되어 있는 집단자폐증, 공부도 하지 않고 현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감 상실증,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회를 선도한다고 자만하는 도덕적 자아도취증, 맞지도 않는 억측만 쏟아놓는 만성적 예측불능증, 이름이 잊혀질까 매스컴의 리듬에 맞춰 설익은 견해를 유창한 언변으로 늘어놓는 순간적 임기응변증. 
 

 정답은 지식인, 정확히 말하면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다. 체 게바라의 게릴라부대에 참여하기도 했고 현재는 리용 대학 교수인 레지 드브레가 〈지식인의 종말〉(예문)에서 내린 진단이다. 드브레는 이런 지식인들을 ‘최후의 지식인’이라 일컫는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 전통은 종말을 고했기 때문에 ‘최후’라는 것. 그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은 명료한 비판력, 지적인 소명 의식과 책임감, 선지자적 비전을 갖춘 사람이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프랑스 나아가 유럽의 양심적인 세력을 대표했던 작가 에밀 졸라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강수택(경상대 사회학과) 교수는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삼인)에서 50년대의 창백한 인텔리론, 60년대 참여 지식인론, 70년대 민중적 지식인론, 80년대 진보적 지식인론 등으로 정리한다. 문제는 90년대 이후다. 개별적인 문제의 기술적 해결에 몰두하는 기능적 지식인, 지식의 환전가치에 주안점을 두었던 김대중 정부의 이른바 신지식인, 저널리스트나 방송인에 가까운 탤런트형 지식인. 이런 지식인(?)이 득세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지식인이 참여할 수 있는 전선(戰線)은 분명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도 나부끼지 않는’게 현실이다. 레닌이 1902년에 발표한 책제목이기도 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고민하는 형국이다. 강수택 교수는 이에 대해 ‘모든 지식인은 잠재적인 시민이며 모든 시민은 잠재적인 지식인’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시민적 지식인론을 제시한다.

 지금까지의 우리 지식인상은 대중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대상으로 삼는 모습이다. 학계 차원에서는 외국 이론의 수입 선점이 곧 지식 권력으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시민적 지식인은 지식인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일반 대중의 일상 생활을 중시한다. 요컨대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생활 세계를 자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공적 사안에 관심을 갖고 지성으로서 참여하는 사람이다. 특히 여성, 동성애자, 외국인노동자, 비정규직 근로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나 주변 집단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드브레의 책이 서구 지식인 전통의 종말에 바치는 만가(輓歌)라면, 강수택 교수의 책은 우리 지식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하는 시론(試論)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자를 기리고 슬퍼하는 만가와 미래의 전망을 모색하는 시론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요컨대 우리 지식인들에게는 아직도 ‘가지 않은 길’(Road Not Taken.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아니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