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신문을 창문에 비유하고는 한다. 우리가 창문을 통해 창문 밖의 정경을 바라보듯, 우리는 신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표현일 것이다. 고대신문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고대생들이 고대신문을 통해 고려대학교라는 세상을, 때로는 고려대학교 밖에 있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데 고대신문이라는 이름의 창문은 과연 어떤 색깔의 창문일까?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딜레마는 언제나 언론을 괴롭히는 고민이다. 언론은 정말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가? 워싱턴 포스트나 뉴욕 타임즈는 미국 대통령 선거 시즌이 오게 되면, 특정 정당의 후보를 지지함을 천명한다. 그리고 그 후보를 지지하는 논조의 기사를 내보낸다. 굳이 정치적 입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자가 어떤 이슈를 기사화하기로 하였는지 결정하는 순간, 데스크가 어떤 기사를 지면에 실을지 결정하는 순간, 이미 주관이라는 것이 개입된다. 사진을 한 장 싣더라도, 그 순간을 포착한 기자의 의도가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같은 사진이더라도 앞뒤 사건의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렇다. 언론은, 신문은 객관적일 수가 없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는 주체에 의해 기사가 쓰여지는 이상, 기사는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가 없다. 사실, 객관적인 신문은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정보사실만 열거하는 신문은, 백과사전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의 의의는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사실의 해석에 있다.! 이러한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독자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언론들이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서로의 관점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편집방향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통계를 가지고 장난치는 일은 배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신문에 투영되는 세상에는 분명한 색깔을 담아야한다. 고대신문은 어떠했을까? 단순히 일어난 사실만을 그대로 전달하지는 않았는가. 혹은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받아적지는 않았는가. 학우들에게 그 사실이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풀어서 전달하고자 했는가.

이제 개강이다. 새내기가 들어오고, 학교는 봄내음으로 가득찰 것이다. 다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할 때이기에 더더욱 오래된 고민을 다시 떠올려본다. 기자는 기사로써 말을 한다. 고대신문의 대답은 이번 학기에 고대신문의 지면에 출력되는 기사를 통해 전달될 것이다. 이번 학기에 고대신문은 어떤 색깔의 창문이 될지, 다채로운 세상을 담을 수 있을지, 어떤 답을 내놓을지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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