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모군(24)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교 복학을 앞둔 청년이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어머니의 구박을 피해 방문을 잠그고 하루 종일 마우스를 쥔 채 인터넷을 하는 것이다. 밥도 세 끼 중 두 끼는 라면으로 해결하며 밥을 먹거나 화장실 갈 때가 아니면 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나는 법이 없고 양치질도 자주 하지 않는다. 자기 전 전등을 끄러 가기가 귀찮아서 전등 스위치에 긴 끈을 연결해 손이 닿는 곳에 두었다.     

이러한 모습이 요즘 화두로 오른 ‘귀차니즘’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귀차니즘’, ‘게으르니즘’은 귀찮음과 게으름에 영어 ‘ism’을 붙여 만든 조어이다. 귀차니즘은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을 단지 귀찮기 때문에 안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 몇 년 전부터 젊은 층에 공감대를 형성해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이제는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 잡았다.

귀차니스트(귀찮음+ist)들이 주로 활동 하는 디씨인사이드(
www.dcinside.com) 게시판에는 귀차니즘 문화가 일반화 돼 있다. 이 사이트는 처음에는 단순히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정보공유를 위한 장이었다. 점차로 네티즌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디씨인사이드 측에 요청했으며 순식간에 일명 ‘햏자’로 통하는 네티즌들이 ‘아햏햏’, ‘압박을 쌔우다’, ‘방법한다’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햏자’로 불리는 귀차니스트들은 대부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거의 하루 내내 마우스를 잡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들은‘졸리면 자고, 자다 지치면 깨고, 깨면 배고프고, 배고프지만 참고, 열심히 참으면 다시 졸립고, 졸리면 잔다’는 행동강령도 있다. 또한 최대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행동강령에 따라 책상에 휴지, 손톱깎이, 베개, 효자손 등 온갖 필요한 물건들을 올려놓아 동선을 줄인다. 또한 인터넷을 뒤지다가 방대한 양의 자료를 만나면 ‘귀차니즘이 발동한다’고 표현하며 인터넷 난독(難讀)증을 보이기도 한다. 

귀차니즘의 확산은 기업에도 영향을 미쳐 이들을 위한 갖가지 상품이 나왔다. 최근 ‘씻어나온 쌀’과 손잡이만 떼어버리면 접시가 되는 ‘매직핸드 프라이팬’, 속옷·양말·스타킹·행주·걸레 등을 별도로 손빨래하지 않아도 되는 ‘미니세탁기’가 그것이다.

이처럼 젊은이들 사이에서 온라인에서의 귀차니즘 문화가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사이버문화연구소 김양은 소장은 “오프라인에서의 문제점에 대한 반발이 온라인상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또한 김 소장은 “인터넷상에서 보이는 귀차니즘의 문화를 나쁘다고만 볼 수 없는 이유는 귀찮아서 사회와 소통하지 않는 것보다 오프라인 사회가 그만큼 대화가 단절돼 쉬운 대화통로를 찾다보니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프라인에 비해 타인과 의사소통이 쉬운 온라인에서 개인의 소심함이나 귀차니즘을 마음껏 드러내고자 하는 통로로 최근 스노우 캣(
www.snowcat.co.kr)과 같은 블로그가 유행하고 있다. 블로그(blog)는 웹 로그(web log, 인터넷 일기)의 준말로 날짜별로 개인의 방식대로 세상사를 그려놓아 방문자와 공유하며 자그마한 여론을 만들 수 있는 매체를 말한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한 문화평론가는 “1인 미디어 시대를 맞이해 과거에 매스미디어가 문화를 만들던 것이 이제는 문화의 생산자가 개인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대학생들이 귀차니즘을 추종하고 공감하는 것도 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신분석상담소의 조은희 소장은 “대학생들은 자신이 능력 있고 바르고 좋은 존재가 아니라는 무의식 때문에 자신이 가족, 사회에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상처를 받기 때문”이라며 “한편으로 사회가 자신을 실망시킨 것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에서 나오는 우울한 감정상태의 측면”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정태연(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느끼는 좌절감과 거대하게 조직화된 사회에서 느끼는 개인의 나약함과 무력함이 반영됐다”고 말했다.

인터넷상의 귀차니즘이 부조리한 사회적 영향이라는 전문가의 시각도 있다. 김재휘(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귀차니즘은 비판은 하되 대안을 제시할 수 없어 귀찮다면서 현실을 외면해버리고자 하는 심리”라고 분석했다. 

귀차니즘으로 대변되는 문화는 국경을 넘어 다양하게 발달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곤차로프의 소설 <오블로모프>에서 비롯된 ‘오블로모프 주의’를 통해 현대사회의 고속화, 다양화, 복잡화로부터 빠져나가고 싶은 반문명 현상을 그려냈다. 또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일을 하는 것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끼친 해악을 지적하고 점차 일을 줄여나가는 게으름의 산업이 각광받는다고 예언한 바 있다.

현 사회의 귀차니즘은 대학생을 비롯한 20대들이 진로결정과 취업문제로 고민을 하면서 사회 구조적 문제에 부딪치자 기존의 흐름에 반발, 역행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일환이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를 온라인상의 귀차니즘을 통해 비판하고 해학을 부여하는데 그친 개인들이 이제는 자기푸념과 비하의 차원을 넘어 생각을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바꿔 나가야 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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