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잠을 자고 밤엔 인터넷을 한다. 의식주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서 해결하며 ‘귀찮기 때문에’ 오프라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빠르지 않으면 도태되는 사회 속에서 이같은 게으름이라는 반사회적인 코드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가까운 예로, 방학 동안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로 학기가 시작한 뒤 다시 원래생활로 복귀하는데 어려움을 겪거나 심지어 학기 중에도 귀차니스트의 행동을 계속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다.

귀차니즘의 확산은 인터넷 발달을 통해 게시판이나 홈페이지가 하나의 장소로 대두되어 그들만의 공간을 형성하게 된 것에 기인한다. 이는 “예전에 백수들이 동네 만화방이나 당구장에서 모였던 것에서 발전돼 인터넷이 이들에게 24시간 어디서나 활용 가능한 장소를 주었다”는 자칭 폐인 김병조(23)씨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화코드인 ‘귀차니즘’은 바로 이런 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이다. 과거 하이텔, 나우누리를 비롯한 pc통신 문화를 장시간 활용하던 중고생들이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세대로 성장하면서 현재 대학생을 중심으로 30대 초반까지의 연령대가 주도세력을 형성한다.

귀차니즘을 표방하는 ‘귀차니스트’들은 오프라인에서 게으르고 무능해 보이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누구보다 부지런하다. 사이버라는 또 하나의 영토 안에 담론문화를 이끌어내고, 익명성을 악용해 욕설을 하거나 음란한 대화를 하는 네티즌에게 제재를 가하는 등 물리적 제재가 덜한 온라인의 질서를 유지시키기도 한다.

하룻밤 새 5천여 개의 글을 게시판에 남겨 사이트를 마비시키는 ‘사이버대전’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이끌어내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 지난해 대통령선거와 국민경선에서는 정치토론의 장을 열어 활발한 토론을 펼쳐 국민들의 의견을 잘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대통령 선거 후 파문을 일으킨 ‘민주당 살생부파문’은 정치칼럼사이트 서프라이즈(seoprise.com)에 남겨진 글에서 촉발된 것이다. 여기서 귀차니스트들은 사회정치에 적지 않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다만 현실참여의 방법을 온라인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는 모습에 대해 선용진 문화연대 정보팀장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은 동일하며 귀차니스트들이 단순히 온라인에서만 활동한다고 해서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며 “오히려 의식개혁의 측면에 있어서는 한 발 앞서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생산활동에 임할 시기에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생활태도는 아직까지 사회의 지적을 계속 받고 있는 상황이다. 취업 준비생인 대학생을 대상으로 귀차니즘이 확산된다면 부가가치 창출원이 적어지면서 근본적으로 국가경쟁력이 줄어든다는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 일본에서는 이와 유사한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가 있다. 지난 1990년대 초부터 일본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급증하기 시작해 현재 12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1억2000만 일본 인구의 1%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로 이들의 30%가 30세 이상의 남성으로 사회문제화 되고 있어 ‘히키코모리 퇴치운동’마저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인터넷중독 예방 상담센터(
www.internetaddiction.or.kr)의 관계자는 “귀차니스트 등의 등장은 인터넷의 역기능으로 하나의 생활장애이며 병리적 현상으로 보고 있다”며 시급히 개선되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제 귀차니스트들은 ‘사회적 치료’를 넘어서 ‘사회적 이해’를 더욱 필요로 하고 있다. 점차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지만 아직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는 이들을 무능력자나 사회부적응자로 보는 현실 때문이다.

디씨인사이드 김유식사장은 이에 대해 지난해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난 디지털 폐인, 귀차니즘에 빠진 이들이 대부분 삼성SDI, 데이콤, 세스코 등 첨단 업종 종사자 였다”고 전했다.
 
귀차니스트들이 인터넷 중독자와는 달리 오랜 시간 인터넷을 하면서도 인터넷 서핑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사이트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분석하고 연구해 정보통신 분야의 실력을 키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귀차니즘 자체가 사회가 요구해서 생기지도 않았고 사회의 변화에 의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에 대해 한 문화평론가는 “문화의 우열을 정확히 판가름 할 수 없듯이 귀차니즘을 옳다 그르다 판정하는 것은 주변의 시선이나 타인의 관점이 아닌 자신의 의지”라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자신의 활동영역을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구분하는 것은 개인이 가진 선택의 자유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한 채 생활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두 개의 가성을 하나로 줄이는 것이다.

어느 한 쪽에 편중되지 않은 중용을 지키는 것이 디지털 시대  귀차니즘 사회를 사는 하나의 해결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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