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대표하는 선수에서 KOREA를 대표하는 선수로… 박용택

초를 다투며 바쁘게 진행됐던 인터뷰를 마친 후 선뜻 고대 유니폼을 입고 기념촬영에 응해주었다. 사진 김민규


2002년 데뷔 후 꾸준히 서울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불리는 이가 있다. 한 때 서울지하철을 대표하는 모델이었던 LG트윈스의 ‘쿨가이’ 박용택(경영 98)이다. 작년 부진을 이겨내고 8월 10일까지 타율2위에 해당하는 0.363을 기록하며 공•수•주 모든 분야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최고의 시즌을 맡고 있는 그. 최고의 인기 야구 선수로 자리매김하게 있는 그에게 우리학교와 정기전에 대한 추억을 들어 봤다.

송추, 특별한 98학번
안암에서 한 시간 반쯤 떨어진 곳엔 우리학교 체육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야구, 축구, 럭비 훈련을 위한 송추 운동장이 바로 그 곳이다. 학우들에겐 생소할지 몰라도 운동부 특히나 야구부에겐 캠퍼스 같은 장소이다. 박용택에게 송추는 특별한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97년 여름에 완공되었으니 내가 1기 송추 졸업생일 겁니다. 우리 땐 지금과 달리 4년을 꼬박 합숙으로 보냈죠. 지금의 송추는 그 당시에 비하면 엄청난 도시죠. 슈퍼도 있고, 사람 사는 아파트 단지도 들어서고” 그 당시엔 노래방은 고사하고 슈퍼도 없었다고 한다. 덩그러니 있던 당구장이 유일한 취미이자 휴식거리였다. “그 당구장은 사장님 컨디션에 따라 열고 닫고 했었어요. 아저씨가 컨디션이 조금 안 좋으신 날은 공이며 당구대며 우리가 다 정리하고 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합숙 생활로 오랜 시간을 지내서인지 98학번들과는 특별한 에피소드가 정말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1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송년회를 ‘핑계’ 삼아 우정을 쌓아 가고 있다고 한다. 어떤 에피소드가 있냐고 묻자, 그는 옛 기억에 잠기듯 잠시 냉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런저런 많은 얘기가 있는데… 우선 수능 볼 때쯤 다 같이 설악산으로 ‘납치’됐던 기억부터 나네요. 그 당시엔 지금과 달리 프로랑 대학 사이에 선수 계약 경쟁이 무척 심했어요. 프로 계약을 막기 위해 모든 동기들과 함께 설악산으로 들어가 숨어 지냈죠. 수능 즈음에 한창 춥잖아요. 어떤 한 친구가 계곡에 뛰어 들었다가 죽을 뻔 했던 기억도 나네요. 그리고 1학년 때 정기전을 앞둔 몇 주 전 모든 선수들이 송추 합숙소를 탈출해서 신문 기사에 난 적도 있었어요. ‘명문대 운동부 집단 탈출’이라는 기사로….” 고교우선지명을 받을 만큼 뛰어난 선수였음에도 프로가 아닌 대학에 진학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제가 대학을 선호하던 마지막 세대의 선수일 거예요. 99년에 FA제도가 처음 생기면서 프로를 선호하게 되었고… 휘문고 시절 때부터 고대와 많은 연습게임을 가졌어요. 가끔은 이기기도 했었고, 우리 팀이 굉장히 강했거든요. 연습경기를 자주 갖다보니 눈에 띈 거죠. 아버지에게 야구 외적인 사회적 평판 등 구구절절한 얘기에 설득을 당했죠.” 박용택은 실력과 명성에 비해 낮은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 중 하나이다. 대학에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FA제도의 수혜를 한 번 받았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아버지가 미안해하고 계세요. 하지만 저는 지금 제가 지명을 받더라도 심사숙고 끝에 대학을 진학할 것 같아요. 고대에 와서 제가 얻은 것이 굉장히 많아요. 고등학교 땐 항상 1번 타자를 쳤었는데, 대학에서 근력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외야로 공을 멀리 날리는 ‘장타의 맛’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특별한 98학번 동기들과 좋은 선후배도 많이 얻었으니까요. 그것은 돈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추억이잖아요”라며 미소를 보였다.

슬럼프 속에서 힘이 되어준 고대
박용택은 작년에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부상이 오기도 했지만, 방망이는 지독하게도 그를 외면했다. 그 속에서도 많은 선후배들이 먼저 조언과 위로를 해줬다. 가장 대표적인 이들이 대학 시절 같이 생활했던 최희섭(법학 98)과 이택근(체교 99)이다. 올 시즌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을 때에도 슬럼프가 찾아 왔다. 그에게 극복할 큰 힘을 준 것도 우리학교의 우승이었다고 한다. “후배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선배로서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로야구가 매일 진행되는 과정 중에 바빠 후배들을 챙기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아마야구가 요새 중계도 많이 되고, 아무래도 우리가 훈련을 진행하는 낮 시간에 주로 하다 보니, 더그아웃에 항상 틀어져 있어요. 듣자하니 3년 만의 우승이라고 하던데, 우리 선배들은 한 해에 3개 대회 우승하는 것을 3년 연속도 했었고, 우리 때까지만 해도 1년에 1~2개는 무조건 우승해야 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좀 아쉽긴 하네요”라며 후배들의 선전을 독려했다. “희섭이도 작년에 부진을 함께 겪어서 야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했고, 택근이에게도 많은 조언을 얻었어요. 그 두 동기가 없었다면 올 시즌처럼 이렇게 인터뷰할 일도 많이 없었을 겁니다. 학교 다닐 때 같이 생활했던 선배들도 많이 만나요. 강봉규(체교 96, 삼성), 강병식(체교 96, 히어로즈), 김선우(체교 96, 두산), 김상훈(체교 96, KIA) 선수들은 우리 팀(LG)이 장비에 대한 지원이 풍부해 많이 뺏어가기도 해요. 서로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구요. 그리고 올 시즌엔 특히 고대 출신 야구선수들이 잘하잖아요. 그 중 최고만 되어도 최고의 야구선수가 될 것 같아요.” 조언을 받더라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극복해낼 수 없다. 박용택은 뼈와 살을 깎는 노력으로 슬럼프를 극복해냈다. 더 이상 총망받는 유망주가 아니다. 팀의 중견이고 기둥이다. 후배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 줘야하는 자리에 올라 서고 있다. 그는 작년 부진에 대해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대답해 나갔다. “저는 작년에 슬럼프가 아니었어요. 제 능력 부족이었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제가 가장 좋았던 때를 기억하려 애썼고,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더욱 더 나아가 배우는 학생들에겐 슬럼프란 없어요. 배우는 과정일 뿐. 좌절할 시기가 아니에요. 잘 안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교훈을 찾아야 해요. 기본적인 것부터 배우고 미래 계획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보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기전
박용택은 대학 시절 기억에 남는 경기로 자신이 뛰었던 정기전 4경기를 모두 손에 꼽았다. 그가 재학 중이던 98~01년 전적은 1승2무1패, 팽팽한 맞수였다. 매 경기 땀을 쥐는 치열한 승부였다. 프로에서 많은 관중들 앞에서 경기하는 것이 익숙해진 그에게 정기전 당시 응원은 그에게 어떤 기분이었을까. “최고죠.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늘 고대의 빨간 응원단이 파란 응원단을 압도해주잖아요. 긴장감에 사로잡혀 자주 볼 순 없지만, 외야에서 가끔씩 바라보는 빨간 물결은 정말 최고에요. 경기를 뛸 때 온 몸의 무감각함은 프로 와서도 아직 느껴보지 못했어요. 게다가 정기전 승리 후 뱃노래는 최고의 응원가죠.” 다른 대학과 달리 양 팀은 타 대학의 여름휴가 기간에도 합숙 훈련을 한다. 모든 선수들에게 가장 혹독한 기간이기도 한다. 박용택은 그 기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가장 힘든 기간입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던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가장 힘들었을 때가 2학년 때였는데 당시 주장이 강봉규 선배였어요. 봉규 형은 FM을 지키시는 원칙주의자라, 장마철 새벽에 비가 오면 앞장서 일어나셔서 물길을 트고 계셨지요. 그럼 밑에 우리들이 가만있을 수 있나요. 우리도 덩달아 부지런해지기 시작했죠.” 작년 정기전은 많은 고대 교우들에겐 잊고 싶은 경기일 것이다. 박용택도 작년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가린다. “아마 5점 차 이상으로 패했죠? 그 때 경기를 보다 TV를 끄고 경기를 하기 위해 이동했던 기억이 나네요. 항상 팀 내 고대, 연대 선수들끼리 돈 10만 원 정도 내기는 하거든요. 선배들이 바빠서 못 볼 것 같다고 많이들 생각할 텐데… 다 챙겨봐요.” 정기전 승리 후 웃통을 벗고 단상 위에서 테크노를 췄다는 박용택. 경기 중에 관전 오신 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저 놈은 어느 집 자식이야. 야구는 안하고 매일 놀러만 다녔구만…”라며 주위 분들에게 말했지만, 정작 알고 봤더니 자기 아들이었다고. 정기전 승리 후 집에서는 된통 혼이 나야만 했다. 잠시나마 혼이 났지만 그때의 기쁨은 그저 말로만 표현할 순 없었다고 한다. 올해는 어떤 선수가 단상에서 깜짝쇼를 보여줄지 두고 볼 일이다. “고연전은 무조건 악으로 깡으로라도 이겨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세요.” 박용택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그는 진심으로 후배들에 대한 격려와 모교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매일 진행되는 팀 훈련이 예정된 시간이 되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인터뷰실을 떠났다. 환한 미소와 함께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올 시즌 그는 리그 최고의 타자로 순항 중이다. TV 속의 화려한 모습 대신 보이지 않는 땀과 노력의 결실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이었다.

2000년 정기전
박용택이 4번 타자를 맡고 있던 3학년 2000년 9월. 당시 연세대의 투수는 슈퍼 피처로 명성을 날리던 ‘조라이더’ 조용준(히어로즈)이었다.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강속구와 낙차 큰 슬라이더는 우리학교의 타선을 꽁꽁 묶고 있었다. 9회 2아웃까지 우리학교가 뽑은 안타는 단 3개뿐. 1-0으로 연세대의 승리가 눈 앞이었다. 연세대 응원단과 선수단에겐 승리의 함성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타석에 들어선 3번 타자는 볼카운트는 2-0. 3구 삼진을 잡기 위해 성급하게 들어오던 직구는 안타로 연결됐다. 타석엔 4번 타자 박용택. ‘조라이더’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두 차례의 헛스윙으로 볼카운트는 다시 2-0, 다시 뚝 떨어지는 ‘조라이더’를 결정구로 삼은 그 공은 박용택의 발등을 살짝 맞추게 되어 주자는 2사 1,2루. 하지만 조용준은 5번 타자 이택근을 상대로 다시 2-0으로 유리한 볼카운트를 가져간다. 세 번째 공이 가운데 몰리면서 이택근이 때려낸 그 공은 당시 연세대 유격수였던 이현곤(KIA)의 글러브 밑으로 빠지며 1-1 동점을 만들어 냈다. 경기는 그대로 무승부로 끝났지만, 다 이겼다고 생각한 경기를 놓친 연세대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고, 우리학교는 승리와 다름없는 환호성과 함께 승리의 ‘뱃노래’를 만끽할 수 있었다. “사실 택근이가 친 공이 유격수 땅볼로 잡혀서 2루로 던지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달렸어요. 빠질 줄 알았으면 슬라이딩 안하고 홈까지 달려 보는 건데. 현곤이는 아직도 그래요. 일부러 빠뜨려 준 거라고. 걔는 9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 때 뱃노래는 이겼을 때보다 더 신나게 했었어요.” 박용택이 회고하는 짜릿했던 2000년 정기전에 대한 추억이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