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한상우 기자)
비가 쏟아지는 폐차장, 노란 우비를 입은 소녀가 버려진 로봇을 보고 있다. 소녀는 뒤돌아서 낡은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린다. 움찔거리는 로봇의 손가락. 짧은 연주를 멈추고 소녀는 자동차 경적이 울리는 곳으로 뛰어간다. 잠시 후 일어난 로봇은 소녀가 두드린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을 올려놓는다.

지난 8월 열린 제 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 이하 제천영화제) 홍보 트레일러의 내용이다. 신선하다 못해 독특한 이 트레일러는 제천영화제와 많이 닮았다. 제천영화제는 대부분의 상영작을 음악 영화로 정하고 영화에 어우러지는 음악 공연을 하는 등 ‘전에 본 적 없는 새로움’을 컨셉으로 한다. 올해엔 영화제 기간 6일 동안 12만 명의 관객이 찾아오고, 토요일 밤 공연엔 공연장 만석을 넘은 5000명이 참석하는 등 성황을 이뤘다. 제천영화제의 프로그래머 전진수(철학과 84학번) 씨는 각종 영화제를 돌아다니며 상영할 영화를 고르고 공연할 밴드를 섭외하며 제천영화제가 단기간에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영화가에서 화제가 됐던 ‘원스’나 ‘로큰롤 인생’을 개막작으로 선택한 것도 그였다.

전진수 씨는 새로운 일을 찾아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영화제의 컨셉 ‘새로움’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전 씨는 재학 시절 고전음악감상실에서 활동하며 2000여 장의 클래식 LP 레코드를 모았고, 감상실 활동이 끝난 뒤엔 본교 교육TV방송국 KUTV의 설립을 도왔다.

졸업 후 공연예술 잡지 <객석> 등에 글을 연재하며 고전음악전문가로 활동하다 영화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국대 대학원 영화학과에 들어가 연출 수업을 받았다. 3년을 현장스텝으로 일하다 경력사원 특채모집을 하던 삼성전자에 입사해 클래식 CD 프로듀서 일을 시작했고 그마저도 지인이 만든 음악 전문 잡지로 자리를 옮기며 그만 뒀다. 잡지일이 잘 맞지 않자 영화이론을 다시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제8대학’에서 다큐멘터리 이론을 배워 한국으로 돌아온 뒤 본교에서 ‘언어와 시각 커뮤니케이션’ 등의 강의를 맡았고, 동시에 ‘출발 FM과 함께’와 같은 라디오 클래식 방송들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전주영화제에서도 잠시 일하다 지인의 권유로 지난 2006년부터 제천영화제의 프로그래머를 맡게 된 것이다.

하는 일, 머무는 곳 등이 수시로 바뀐 전진수 씨에게 ‘음악’은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주제다. “고전음악감상실에 있던 LP 4000장을 빠짐없이 다 듣고, 음악을 틀어주는 가게에서 하루 종일 죽칠 만큼 음악을 좋아했어요. 꼭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음악이라면 일단 듣고 본 것 같아요. 하는 일이 바뀌어도 음악에 관해선 제 결정이 누구보다 옳다는 확신은 변하지 않았죠. 영화는 하고 싶었지만 한계를 느낀 거고”

제천영화제가 5년 만에 궤도에 올라 매년 성장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전 씨는 언제라도 ‘느낌이 확 오는 일’이 있으면 그 쪽으로 뛰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요리를 좋아하는 그는 식당을 차리고 싶기도 하고 못 이룬 꿈인 영화감독도 해보고 싶다고 한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면 복이 많은 거죠. 요즘 학생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기보단 불안하기 때문에 일단 노력부터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시대의 탓도 있겠지만 아쉬운 것은 사실이죠. 스펙을 쌓기에 앞서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며 어떤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가를 찾아냈으면 해요. 그러고 나서 그 일을 향한 스펙을 쌓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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