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은 그의 유명한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노래했다. 그는 관계가 설정되지 않은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나간 과거를 기록하는 행위도 서로의 연결고리를 찾아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지난 1629호 고대신문의 ‘탁류세평’에서 김정숙 교수는 ‘어설피 기록하는 삶이 아닌 기억하는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 말처럼 ‘감성과 정신의 움직임을 충분히 포함하지 않는 기록 행위’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과거의 사실에, 진정한 관계를 설정해 주기에는 무언가 부족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꼬박 꼬박 일기를 쓰는 필자의 경험으로는 사소한 기록 하나가 당시의 추억을 되살리는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너무 잘 알기에, 기록하는 삶을 자칫 무의미한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던 지난 ‘탁류세평’에 아쉬움을 느꼈다. 

조선 왕조 500년을 이끌었던 유학자들은 지금 우리가 보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록하는 삶을 소중하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은 그 양이 너무 방대해서 한 권씩 쌓으면 63빌딩을 만들고도 남는다고 한다. 유학자들은 그 외에도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많은 국가 기록을 남겼고, 개인적으로도 수많은 문집류의 기록물을 남겼다. 이는 당시 내세관이 없던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의 의미를 투영하는 대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을 가치 있게 여겼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처럼 기록은 단순히 순간의 감성이나 감정, 아이디어를 잊지 않기 위해 이루어지는 실용적인 행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소중한 연결고리인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노래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추억들은 당시의 언어로 기록돼 있을 때 진정한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당신의 추억이 계절의 절정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면, 그 순간을 부족한 언어로 기록한다고 해도 그 순간은 문자 속에 갇혀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문자(혹은 사진)를 접하는 순간,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당시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행복함을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순간을 애써 기록하라. 그렇지 않으면 즐거웠던 순간은 신기루처럼 아득히 멀어져, 당신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지고 말 테니….

 박영채(문과대 한국사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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