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준결승전 상대인 독일과의 경기에서 미하엘 발락(첼시)에게 한 골을 내줬다. 그 골은 결승골로 이어지며 결승의 문턱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한국이 보여준 정신력과 응집력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세계 대회 4강 진출은 이미 그로부터 약 20년 전에 이룬 적 있었다. 바로 1983년에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다.


‘붉은 악마’의 기원

한국은 첫 경기였던 스코틀랜드전에서 0-2으로 패했다. 많이 긴장했던 탓일까. 고산지대를 대비해 마스크를 쓰면서까지 태릉에서 지옥훈련을 했던 대표팀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나섰던 다음 경기에서 한국은 홈팀 멕시코를 2-1로 물리치며 기사회생했다. 이어진 호주와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도 2-1 승리를 거두며 8강에 진출에 성공했다.

8강전에서는 연장 혈투 끝에 우루과이를 역시 2-1로 이기고 4강 진출을 결정지었다. 준결승전 상대는 지금도 세계 최정상인 브라질이었다. 준결승전이 열리던 시각은 한국 시간으로 평일 오전이었지만, 전국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수업을 중단하고 함께 라디오 중계를 들었다고 한다. 도심은 한산했고, 사람들은 TV에 모여 앉아 대표팀을 응원했다. 우리 대표팀은 전반전에 김종부의 선취골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반전 베베토가 이끈 브라질의 공세에 두 골을 내리 헌납하며 결국 1-2 아쉬운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비록 결승 진출에 실패했지만, 4강 진출이라는 성적은 당시 한국축구의 수준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성적이었다. 이때 해외 언론들은 상하의가 붉은 유니폼을 입은 채 그라운드를 쉬지 않고 누비던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붉은 악마’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자칫 없었을 뻔한 83년 4강의 기적

83년 대회는 4강 진출이라는 쾌거로도 기억되지만, 많은 이들은 김종부와 신연호(이상 체교 83)라는 걸출한 스타들을 배출한 대회로 기억한다. 우리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종부와 신연호는 이 대회에서 각각 2골(2어시스트), 3골을 넣으며 4강행을 이끌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표팀이 아시아 예선에서 탈락하여 세계 대회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면 4강 진출은 물론 배출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원래는 그랬다. 우리 대표팀은 아시아 1차 예선에서 북한, 중국에서 져서 아시아 대회 본선에도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이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주심을 집단 폭행한 것이다. 이에 FIFA는 청소년 대표를 포함한 북한 대표팀에게 국제대회 출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아시아 예선에서 3위를 기록한 우리나라가 운 좋게도 본선에 대신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이 여세를 몰아 우리 대표팀은 세계 대회 출전권까지 따내게 된 것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투톱’의 등장

멕시코에서 4강 신화를 이끈 강력한 투톱이 있었다. 바로 우리학교 출신 김종부(체교 83)와 신연호(체교 83)이다.

김종부는 새내기 대학생 시절, 이미 스타덤에 오른 한 축구선수였다. 세계 무대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상대 수비수들을 놀라게 했던 청년은 이제 중년의 축구 감독이 되어 있었다. 김종부는 2006년부터 중동고 축구부를 맡고 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중동고를 떠나게 됐다는 김 감독은 아쉬움에 가득 차 있었지만 마지막 결승전에 오른 모교를 우승시키겠다는 의지가 가득 차 있었다.

한편 그의 ‘단짝’이자 때론 ‘라이벌’이었지만, 우리학교와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의 투톱으로 활약한 파트너가 있었다. 머나 먼 이국땅 멕시코에서 ‘황색 펠레’로 불리며 화려한 기술과 득점력으로 우리나라 청소년 축구팀을 4강에 올려놓은 주인공이다. 바로 단국대 축구팀 수장과 SBS스포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연호(체교 83)감독이다. 그 때 그가 대회에서 기록한 3골은 아직도 깨지지 않은 대한민국 선수가 세운 한 대회 최다득점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들에게 지난 날의 그들의 이야기와 멕시코 ‘4강 신화’에 대한 추억, 그리고 26년 후 후배들이 만들어 낸 세계청소년대회 8강 진출에 대한 감회를 들어보기로 했다.


26년 전, 신화의 중심에 선 신연호
사진 김명선

대표팀과의 인연은 1982년 U-19대표로 발탁된 것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본인에게는 대표팀에 발탁된 것을 꿈이라 생각하리만큼 갑작스러운 호재였다. 발탁된 기쁨도 잠시, 대표팀은 동아시아 예선에서 3위에 머물며 AFC U-19챔피언십 결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북한이 아시안게임에서 난투극을 벌여 국제 대회 참가 정지가 선언되고 3위를 차지한 우리나라에게 본선 출전권이 부여되었다. 어렵사리 진출한 본선에서 1위를 차지하며 기분 좋게 대학으로 진학했다. 대학진학 후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를 차출되어 멕시코에서 열리는 대회를 대비한 훈련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국가적으로 경제상황도 좋지 않고 여러 가지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현지로 전지훈련을 가지 못했다. 대신 고지대인 멕시코의 환경을 재연하고자 마스크를 쓰고 훈련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요즘으로서는 뭐 그런 훈련이 있냐며 비웃을 법 하지만 그 때 어린 선수들에게 무언가 해야겠다는 성취 욕구를 일깨운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박종환 감독 특유의 카리스마와 선수들의 강한 정신력은 우리나라 축구를 4강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해냈고 아직까지도 자주 회자되는 역사의 한 축이 되었다. 그 당시 함께 투톱으로 나서 신 감독과 함께 팀의 득점을 책임졌던 김종부(체교 83) 현 중동고 감독과는 대학 동기로, 골 사냥의 선두에 서는 파트너로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비록 훗날의 향방에서는 다소 명암(明暗)이 엇갈리기도 했지만(신 감독은 프로에 진출해 비교적 순탄한 선수생활을 하였고 김 감독은 대우-현대 이중계약 파문에 휘말리며 선수 신분을 정지당하고 졸업을 유예 당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아직까지도 좋은 관계로 남은 소중한 인연이었다.


새로운 역사를 쓴 홍명보 호(號)

홍명보(체교 87) 감독은 U-20대표팀을 맡음으로서 감독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초·중·고 감독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국가 대표팀을 잘 맡을 수 있겠냐며 쓴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감독직이라는 것이 실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팀을 이끌고 지휘해나가는 수 많은 경험을 통해 잘 수행할 수 있는데 홍명보 감독에게는 이 점이 부족하다는 우려였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은 외간의 풍파를 잘 견뎌내고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이 점에 대해 신 감독은 “선수들이 감독을 잘 따랐고 선수와 코칭 스태프 간의 유대가 깊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이 모든 것이 감독의 역량”이라며 홍 감독의 지도력을 극찬했다. “전술적으로도 짧은 패스와 긴 패스를 적절히 섞어 경기를 잘 풀어나간 점이 인상 깊었으며 선수들 스스로가 여유를 가지고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플레이로 이끌어 간 것이 청소년대표답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요즘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유학을 통해 직접적으로 혹은 인쇄 매체나 영상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선진 축구를 자주 접했기 때문에 창조적인 플레이도 많이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칭찬만 하시다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린 선수들에게 프로 진출이 유행처럼 번져 너나 할 것 없이 기회만 되면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고 대학교 재학 도중에 프로진출을 하는 사례가 많아진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신 감독은 “선수들이 다 시기에 맞추어 상급으로 진출해야 한다. 나이가 어린 선수들이기 때문에 대학에서 경기 경험을 더 하고 신체적으로도 힘과 체력적인 부분을 좀 더 보완한 후 프로에 진출해야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는데 좀 더 많은 생각을 한 후 프로 진출을 하는 것이 선수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며 어린 선수들의 성급한 프로 진출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스포츠 해설 그리고 유소년 축구 사업, ‘야전’으로의 복귀

프로팀 코치를 그만 두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고향인 여수에서 유소년 축구 교실을 열기도 했다. 신 감독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유소년 축구 교실은 오늘날의 자신을 있게 한 축구와 고향 선배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기 위한 작은 노력에 불과했다”며 겸손을 보였다. “평생 배운 것이 축구라 고향에 보답하기 위해 그런 사업을 하게 되었다”며 웃으신다. 잠시 지도자의 자리를 떠나 외도를 한 신 감독이지만 다시 ‘야전’에 돌아오니 더 없이 뿌듯하고 행복하다고.

신 감독은 현재 SBS스포츠 해설위원도 겸임하고 있다. 해설을 시작하면서 경기 내적인 측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축구를 잘 전달하기 위한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들을 많이 배웠단다. 외도 아닌 외도는 지도자의 경험에 큰 도움을 주었다. “현장에서 지도자의 자리가 나에게 있어 가장 올바른 위치란 생각이다. 감독직에서의 실전경험을 좀 더 보충하기 위해 해설을 시작한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하게 된 소중한 계기였다”며 “현재도 실전을 통해 축구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측면으로 축구를 보기 위해 해설직을 아직까지도 겸임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학교 감독, 천운이 닿아야 갈 수 있는 자리

연배로 보면 이제 모교에 돌아와 감독을 한 번쯤 해야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신 감독은 “천운이 닿아야 갈 수 있는 자리”라며 우리학교 감독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나타냈다. “우리학교에는 워낙에 유명하고 훌륭한 선후배들이 많아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며 “모교 감독이라는 자리는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내 업적도 중요하지만 주변 여건이 허락되어야 갈 수 있는 자리” 라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 자리에 가보고 싶다며 “지금은 현재에 충실할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신연호 감독은 인터뷰 당일 연세대와의 U리그 8강전 홈경기가 있었다. 멀리 안암에서 찾아 온 후배들에게 한 마디라도 더 좋은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어했지만 시간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꼭 이겨 안암에서 우리학교와 결승전을 펼친 후에 다시 담소를 나누자고 얘기하셨지만, 같은 날 우리학교가 경희대에 PK패를 당하는 바람에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됐다. 단국대는 연세대에게 2-1 승리를 거두며 U리그 4강전에 당당히 진출했다. 앞으로도 ‘노력하는’ 감독 신연호의 선전을 기대한다.


비운의 스타, 김종부
사진 한동열

김종부를 언급할 때 빼먹지 않고 등장하는 수식어다. 김종부는 83년, 꿈에 그리던 고려대에 당당히 입학했고 그 해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4강의 주역으로 활약하여 대형 스트라이커로 급부상했다. 이어 한국이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데 일조하여, 그가 졸업하던 해에 많은 팀의 영입대상 1순위로 떠올랐으나 드래프트 파동으로 그의 앞길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었다.

“학교와의 마찰은 미미한 부분이었다. 문제는 대우와 현대 사이의 줄다리기였다.” 그를 데려온 이차만 당시 우리학교 감독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신입생 당시 적수가 없었던 우리학교는 전국대회 5관왕을 차지했다. 좋은 성적을 낸 이차만 감독은 다음 해 대우로 자리를 옮겼다. “스폰서나 에이전트가 없던 시절이다. 스승님을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김종부가 대우로 마음을 확실히 정한 것과는 달리, 당시 현대의 후원을 많이 받고 있던 학교는 김종부의 현대 행을 고집했다. 결국 김종부는 학교와 현대의 끈질긴 설득에 지쳐 결국 현대와 계약을 해 버렸다. 12일 뒤, 김종부는 현대가 계약서의 단서조항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을 파기하고 대우로 갈 것을 밝혔다. 김종부가 대우와 계약하자, 학교는 그를 축구부에서 제명시켰고 김종부는 한 학기 늦게 졸업하게 되었다.

현대는 대한축구협회가 선수등록규정을 개정하며 김종부를 대우 소속으로 인정하자, 이에 반발하여 팀을 해체한다. 결국 김종부가 포항으로 팀을 옮기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선수 한 명을 놓치고 싶지 않아 했던 대기업들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김종부는, “지금이라면 현대로 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연결고리가 없던 현대보다 스승님이 계신 대우로 가고 싶었다”고 했다.

팀을 포항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대우 유니폼을 입고 일본 대표팀과의 친선 경기에 참가했고, 축구협회의 징계를 받게 되었다. 대우는 이미 경기에 김종부가 나온다고 홍보를 해 놓은 상태였고 팬들은 김종부의 플레이를 보고싶어 했다.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 싫었던 김종부는 22분 남겨놓고 출전했다. 대우 측에서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김종부의 선수 생활에는 1년 반 정도의 공백이 생겼다.

드래프트 파동은 일단락 되었지만, 결국 피해는 자신에게 돌아왔다. “예전 감각을 완전히 되살리는 것은 무리였다. 재기하고 싶은 마음은 컸으나 현실에 부딪히는 부분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조력자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경기에 나가면 나이 많은 선수들에게 욕도 먹고 태클을 많이 당했다. 드래프트 파동의 여파였다.


세계 무대에서 당당히 서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예선전은 고등학교 때였다. 아시아 1차 예선에서 북한과 중국에게 진 한국은 아시아 대회 본선에도 못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 북한이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주심을 집단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일로 인해 FIFA는 북한에 국제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내렸고, 아시아 예선을 3위로 통과한 한국이 아시아 본선에 나가서 마침내 세계 대회 출전권을 따내게 되었다.

하지만 김종부는 아시아 예선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당시 주전 스트라이커는 신연호와 이기근이었다. 이들은 골 결정력이 높았던 골잡이들이었다. 청소년대표를 맡고 있던 박종환 감독은 처음부터 김종부를 내보내지 않고 멕시코에 가서 출전시켰다. “아마 팀에 변화를 주기 위해 나를 쓴 것 같다. 나는 상대 수비 라인을 뒤흔들고 몸싸움과 위치 선정에 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시 대표팀의 훈련은 그야말로 스파르타 식이었다. 정보도 없고 장비 면에서도 뒤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서는 나이가 어려도 프로팀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한국팀을 그렇지 않았다. “멕시코의 고산 지대를 대비해서 마스크를 끼고 훈련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수도 있지만 과학적인 시스템이 없던 시대였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서너번 씩 들었다.”

선수권 대회 본선에서의 첫 상대는 스코틀랜드였다. 이미 전반전에 두 골을 허용한 뒤, 김종부는 후반전부터 출전했다. “진 경기지만 잘 풀린다고 느꼈다. 중동고-연세대 출신인 오왕근 단장은 감독님에게 나를 기용하라고 했다. (신)연호와 궁합이 잘 맞아 좋은 플레이가 많이 나왔다.” 김종부는 호주전에 골을 넣으며 우리나라의 8강 진출에 일조했다.

우루과이와의 8강전에서 우리나라는 연장전 끝에 2-1로 이기고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우리학교 1학년이던 신연호는 선제골에 이어, 1-1이던 연장전에서 김종부의 패스를 받아 골든골을 성공시켰다. 김종부가 골 라인을 치고 들어가다가 크로스를 올렸고 이것이 문전에 쇄도하던 신연호의 발을 맞고 들어간 것이었다.

브라질과의 준결승전에선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선수는 당시 브라질 리그에서 득점 랭킹 1위인 선수가 교체 투입되어 2골을 넣었다고 한다. 경기는 아쉽게 역전패 했지만, 세계 언론은 열악한 환경에서 4강이라는 전무한 성적을 낸 한국 팀에 주목했다.

당시, 박종환 감독은 선수들에게 ‘자신 없으면 종부에게 패스해라’고 할 정도로 김 감독의 플레이를 신뢰했다. 김 감독은, 자신이 외국인 선수와의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고 볼 컨트롤을 잘 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영입 제의가 왔지만 군 문제 때문에 해외 진출은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스카웃 문제가 불거져 뒤늦게 대표팀에 합류했다. 첫 경기였던 아르헨티나 전에는 나가지 못하고 두 번째 경기였던 불가리아전에 나섰다. 후반전에 교체되어 들어간 김종부는 천금같은 동점골을 터뜨렸고 이 때 올린 승점 1점은 한국의 월드컵 역사의 첫 승점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대표팀에서 짧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축구 명가의 재건

최근 김 감독은 8개 대학교 OB 축구대회에 참가했다. “청소년대표 서정원 코치도 와서 뛰었다. 다른 대학들이 이기질 못하더라(웃음).” 김 감독은 우리학교가 훌륭한 선수를 많이 배출한 것처럼 이제는 지도자 양성에도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후배인 홍명보가 큰 일을 많이 해 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홍 감독이 덕장으로서 이번 대회에서 선수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앞으로 더욱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다. (홍)명보가 후배들 지원도 아끼지 않더라”고 덧붙였다.

김 감독은 대학 시절, 대표팀에 자주 차출되어 매번 정기전에서 뛰지는 못했다. 김 감독이 1학년 때, 야구․아이스하키․농구․럭비가 모두 져서 4패를 하던 중, 그나마 축구를 4-0으로 압도적으로 이겨서 체면을 차렸다. 김 감독도 한 골을 넣었다. 그는, 이제까지 고려대나 연세대나 정기전에서 모든 종목을 진 적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학교에서도 신연호와 친했다. 둘다 대표팀에서 막내라서 더 친해졌다. 출신 지역이 먼 탓에 고교 시절, 대통령배에서 맞붙었을 때 처음 서로를 알게 되었다. 둘 다 말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게 쌓여 가면서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김 감독은 언젠가는 우리학교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졸업할 때 문제가 있었던 만큼, 학교를 이끌고 정상에 서 보고 싶다고 했다. “결국 코스모스 졸업을 했다. 수업 안 들어가면 점수를 안 준다고 해서 4학년 때 수업을 많이 들었다(웃음). 그때로 돌아가면 공부를 더 하고 싶다. 축구 실력은 좀 떨어졌어도, 공부 열심히 했던 선배들이 결국에는 많이 앞서 나가더라.”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일에 대한 정열

학교 다닐 때 양궁선수 김진호의 소개로 미팅을 단 한 번만 해 봤다는 김종부 감독. 요즘은 다양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만, 당시 지도자들은 선수라면 운동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혹독한 훈련이 뒤따랐다. 하지만 김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수들이 운동에만 갇혀 있어서 슬럼프가 왔을 때 한 순간에 다른 일에 빠지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자기 일에 정열을 8~90% 쏟으면 슬럼프도 문제없다”는 김 감독의 말은, 선수가 아닌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일 것이다.


[대회 뒷 이야기]  유리창이 예지해 준 8강행

올해 이집트, U-20 대표팀의 이동버스 유리창이 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훈련장으로 출발하기 직전 기사가 창문이 몽땅 깨진 것을 발견한 것. 기사는 현지의 온도가 높아 특수 유리가 녹아 내린 것 같다며 외부에 의한 손상 흔적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1983년 멕시코, 우리나라 선수가 버스에서 내리다가 승용차와 부딪히는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도로가 좌측통행이었던 그 곳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문을 착각해 차들이 지나다니는 쪽으로 내려버린 것. 때 마침 버스 쪽으로 오던 승용차와 선수가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했고 다행히 선수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승용차의 유리창이 깨져 버린 것. 유리가 깨지고 4강에 드는 그 때와 비슷하게 버스의 유리창이 깨진 홍명보호도 8강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은 유리창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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