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60년대에 시골 아이들에게 목욕이란 설날 전에 먼 읍내 목욕탕에 가서쌀벌레 같은 때가 둥둥 다니는 뜨거운탕에 우선 몸을 담그는 것이었다. 그런 시골 아이였던 내가 서울에서 대학생이 되어 좋았던 것 하나가 집 가까이에목욕탕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건재했던 그런 목욕탕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슬슬 자취를 감추었다. 나라의 살림살이가 좋아지자 핀란드식사우나 시설을 갖춘 고급 목욕탕이 비온뒤에 죽순 돋듯 했기 때문이다.
80년대를 전후하여서는 터키탕이라는,기존 사우나 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다른방식의 목욕 시설이 뒤따랐다. 내가 그곳에 가서 즐긴 적이 있다고 말하면 그게어떤 곳인지를 알리가 없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아무런 느낌이 없겠지만 그 당시에 청장년을 보낸 분들은 “아니, 이 양반이 나이가 드니 누구처럼 ‘이성을 넘어영성(靈性)으로’ 가기라도 하나? ”라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는 청량리 오팔팔이나 미아리 텍사스에 간 적이있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가까운 ‘고백’에 속하기 때문이다.
변명을 하자.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사우나탕과 터키탕이 다 있었고 사우나탕에간다는 것이 터키탕에 들어간 것이다. 좀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돌아설 타이밍을 놓쳤고 당시만 해도 객기가 조금 있었던 나는 ‘싸나이로 태어나서…’ 하면서 뭉갰던 것이다. 나는 졸지에 ‘음란서생’이 되었다. 당시의 ‘터키탕’은 일본에서 수입한것이었고, 일본은 터키 정부의 뒤늦었지만거센 항의를 연속 받고 명칭을 고쳤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과정이 반복되었다.
오랑캐(兀良哈)란 무엇일까?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두만강 일대에살던 여진족을 미개한 종족이라는 뜻으로멸시하여 이르는 말” . 한 국어사전의 풀이다. 사전들의 풀이는 대동소이한데 한결 같이 오랑캐와 여진족을 동의어로 보고 있다. 맞는 것일까? 오랑캐는 중앙아시아 초원에 널리 펴져 살던 한 종족의 이름이다. 타타르나 여진처럼 오랑캐도 엄연한 고유명사인 것이다. 그들은 징기스칸이 굴기하자 적극 호응하고 충성을 바쳐 몽골이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한 동안 그 단맛도
보았다. 원이 망하자 명나라에 복속되었지만 자주 충돌하여 명나라의 주적이 되면서 여러 차례 도살을 당했는데 특히 1538년의 사태가 가장 참혹하였다. 잡혀서 노예가 된 자도 부지기수였고 겨우 살아남은 일부는 알타이산으로 달아났다. 중국과북방 민족의 피비린내 나는 대립의 역사는 길다. 은(殷)과 귀방(鬼方), 주(周)와 험윤, 한(漢)과 흉노(匈奴), 당(唐)과 돌궐(突厥), 송(宋)과 거란(契丹)처럼, 명(明)과 오랑캐는 숙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몽골족과 앙숙이었던 여진족 즉 금(金)의 후예들이 세운 청(淸)과도 적대적이었다. 강희제가 총력을 기울여 정벌한 준까얼이 바로오랑캐의 다른 이름이다. 한 가지 짐작이가능하다. 명나라에 사대정책을 펴며 사이가 좋았던 조선이, 명나라의 영향으로 오랑캐를 가증스런 외적(外敵)의 대명사로여겼을 것이라고.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에일부 오랑캐족 병사들이 끼어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 우리가 북쪽으로부터 한반도를 침략한 모든 적들, 병자호란의 청군이나 6, 25전쟁 때의 중공군 까지도 싸
잡아 오랑캐라 불러도 되는 것일까? 중국내몽고 출신으로 모택동을 도와 신중국을건설하였고 국가부주석을 역임했던 오란부(烏蘭夫)는 오랑캐족의 후예다. 내몽고성(省)에 많이 살고 있는 오씨(烏氏)들을위시하여 오랑캐족이 이곳의 소식을 아는날이면 터키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강력하게 항의할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명(名)과 실(實)이 다른 사례가 어디 여기에 그칠까 만 유난히 홍보물이 범람하는선거철이어서 잠시 이에 대한 상념에 젖어 보았다.

김언종 문과대 교수·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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