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건으로 뒤숭숭하던 전국이 6월의 시작과 함께 선거열풍에 휩싸였다. 이번 선거는 이른바 야권의 약진과 함께, 집권여당에 대한 민심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막을 내렸다. 언론은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집권여당에 대한 국민의 중간평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로 한 언론사 여론 조사에서도 많은 국민이 이번 선거를 정부에 대한 평가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결국 청와대도 이러한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다음은? 국민은 투표를 통해 정부와 여당을 평가했지만 그 다음의,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을 것 같다.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는 정치적 과정은 현대 민주국가의 필수 덕목이다. 바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의 원리와 제법 유사하고 역사적으로 가까운 예를 들라면 아마도 붕당정치를 꼽을 것 같다. 붕당정치는 상호 견제와 감시를 통해 상호 공존의 경쟁을 펼쳐 온 조선의 전통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이것은 효종의 장례 복상(服喪)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예송논쟁을 계기로 반목과 대량 살육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특히 의전의 문제를 역모의 문제로 확대시킨 윤선도의 상소로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이덕일에 따르면,예송논쟁 이후 조선의 붕당 정치는 상호 배척과 독존이라는 공멸의 길로 접에 들게 되었다(<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정책대결을 통한 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국정 평가는 어떤 의미로 이해돼야 할까? 평가란 대상의 가치나 수준을 따져 헤아린 결과를 이르는 말이다. 경제 활동에서 가격을 매기는 행위에서 많이 쓰이지만 교육학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된다. 학창시절 각종 시험은 모두 평가 행위이고, 그 결과를 통해 진학이나 입학, 때로는 선생님이나 부모님 애정의 성패를 가른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평가의 개념도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다. 학교 교육에서 평가는 더 이상 선택과 배제라는 이분법의 근거를 넘어 한 개인의 발달과 성장을 돕기 위한 피드백으로서 의미가 강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교육은 나와 다른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나와 발향을 달리하는 타자의 비전에 대해서도 포용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정부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평가가 선택과 배제라는 일회적 편 가르기의 이벤트라면, 선거는 얼마나 살풍경한 일이 될까? 자신과 다른 꿈을 꾼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강요하거나 심판한다면 삶의 공간은 얼마나 삭막하게 될까? 같은 평가를 내리더라도, 배제를 위한 말과 포용을 전제로 하는 말은 그 끝의 날 선 정도가 다르다. 現정부와 여당의 비전과 국정에 대해 두둔하면서 덮어놓고 좋게 보아주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다만 날선 말과 행동들은 결코 생산적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축제는 끝났고, 다시 삶이 놓여 있다. 몇 주 동안 전국 곳곳을 떠들썩하게 했던 각각의 비전과 꿈들은 우열을 가리고 이제 삶의 뒤로 잠시 물러앉았다. 그런데 인터넷의 어떤 공간에서는 아직도 선거운동이 계속되는 듯 보인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얼마나 다른지를 말하고 따져 가리는 데만 혈안이 된 것 같다. 異夢에 가려 同床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호랑이 이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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