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다. ‘민주화’라는 거대담론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낯선 물결이 흘러들었던 그 시절, 1990년대는 그렇게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와 함께 시작되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로 만들어진 ‘여소야대’라는 국회 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꾸기 위해 강행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과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식이 같은 날(1990년 1월 22일)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양한 가치가 혼종되었던 1990년대의 연대기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를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개성과 주관이 뚜렷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다. 이성과 논리보다 감성과 취향을 중시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흐름을 일거에 바꿔놓았다. 현실과 이상이 일치하지 않았던 봉건적 자아와 근대적 자아의 충돌로 인한 모순이 1990년대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극복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집단이나 조직이 아닌 개인의 감성을 중시하며 등장한 새로운 세대는 정치경제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서 1990년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1992년 방영된 <질투>가 당대 시청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질투>는 소꿉친구로 성장한 이영호(최수종 분)와 유하경(최진실 분)의 일상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대의 풍속도를 빠른 속도로 형상화한 트렌디드라마였다. 카메라가 360도로 회전하면서 촬영한, 영호와 하경이 우여곡절 끝에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포옹하며 기뻐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전의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영상 기법으로 이후 트렌디드라마 영상 연출의 교과서가 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로 시작하는 경쾌한 리듬의 주제가가 곁들여지면서 <질투>는 한국형 트렌디드라마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트렌디드라마 <도쿄 러브스토리>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옥의 티로 남아 있지만, <질투>가 1990년대 한국 드라마의 지형도를 변화시킨 것만은 분명했다.

<질투>에서 형성된 한국형 트렌디드라마의 DNA는 이후 <파일럿>과 <마지막 승부>를 거쳐 <사랑을 그대 품안에>, <미스터Q>, <토마토>, <별은 내 가슴에>로 이어지면서 유전자 변형을 겪었다. 자기감정에 솔직한 청춘남녀의 밝고 경쾌한 사랑이 가난한 여자와 부잣집 남자의 사랑으로 변주되면서 수많은 ‘신데렐라’와 ‘캔디’, 그리고 ‘실장님’과 ‘이사님’ 캐릭터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고아 출신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반듯하게 성장하여 알뜰살뜰 직장 생활을 하는, 귀엽고 씩씩하며 사랑스러운 여자”가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지만 항상 고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진정한 사랑을 갈망하는 외로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이렇게 한국형 트렌디드라마의 DNA가 되었다.

다양한 가치의 혼종을 알리면서 시작되었던 1990년대도 어느새 흘러간 과거가 되었다. ‘민주화’라는 거대담론이 지나간 자리를 차지했던 일상생활의 미시담론이 다양성과 개성을 보장해주었던 그때 그 시절은 이제 명맥이 끊긴 트렌디드라마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최첨단의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청춘남녀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연출했던 트렌디드라마 역시 흘러간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트렌디드라마를 통해 표상되었던 해피엔딩, 그 이후가 궁금하다. ‘X세대’ 혹은 ‘신세대’라고 호명되었던 당대 청춘남녀의 모습이 현실이었는지, 아니면 허상이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 국내 제 1호 드라마 칼럼니스트

드라마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동아일보』인터넷웹진 O2에 ‘드라마캐릭터열전’과 『월간 에세이』에 ‘Talk Talk 튀는 드라마’를 연재하면서 트위터(@kdramahub)를 통해 새로운 형식의 드라마비평을 시도하고 있음.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과 『TV드라마, 인생을 이야기하다』 등의 드라마평론집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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