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약육강식 또는 적자생존의 법칙 안에서 살아간다. 환경에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게 된다. 찰스 다윈의 살벌한 이론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끊임없는 경쟁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인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인가. 적자생존의 법칙을 잘 이해하는 자 그리고 대처하는 자가 결국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건가. 일본 대학에서는 토론을 앞두고 학생들이 서로에게 질문을 하거나 도움을 주고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스스로 준비하고 토론이 벌어지는 날에만 모든 것을 공개하는 특이한 문화가 있다. 한국은 어떤가. 이미 청소년시기부터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아이들끼리만 모여 특별과외를 하고 외부에는 공개하지 않는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시험이 다가오면 도움이 되는 자료는 숨겨두고 공개하지 않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얼마나 냉엄한 현실인가.

언제부터 한국의 정신이 이렇게 변질되어왔는지 한숨이 나온다. 어쩜 이런 현상은 살벌하기보단 유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이것이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살아남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소위 스펙이란 걸 쌓고 어느 줄에 서야 되는지 고민한다. 이것이 삶의 중요한 과제라면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브레트만의 책을 읽던 중 그의 글에 감탄하여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물고기만이 물의 흐름대로 흘러간다." 너무나 멋진 말이 아닌가. 이 문장 하나로 나는 더 이상 적자생존의 법칙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어졌다.

흥미롭게도 물고기는 물의 흐름대로 헤엄치지 않는다. 물고기는 물의 흐름에 역류한다. 나는 그것을 '생명'이라 말하고 싶다. 생명은 순응하지 않고 역류한다. 연어가 거친 물살을 역류하여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놀라운 자연의 현상을 보라. 나는 이것을 확인하고 물리학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이 현상을 물리학의 입장에서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는 고민을 하다가 이것은 현대 물리학이 해석하기 어려운 것 같다는 답을 내렸다.

브레트만의 저서를 읽으면서 어쩜 죽은 물고기란 표현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이상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현실이 그런 건지 아니면 그런 변명을 하는 게 더 쉽기 때문인지 말이다. 진실함과 비겁함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청춘은 비극에 노출되지 않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청춘은 생명력이 강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청춘의 힘을 보기가 힘들어 진 것 같다. 청춘을 살고 있는 학생들도 청춘이 갖는 모험의 위대성을 잃어가고 있다. 삶의 의미는 늙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춘을 잃어버리는 순간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절망이자 비극인 것이다. 이 사회에 모험의 즐거움을 찾는 자들이 생겨나길 바라며 진정한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는 말로 글을 마치고 싶다.

김경민 심리학과 교환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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