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국가성(trans-nationalism)에 대한 연구는 지구화의 가속화 속에서 현대 사회에 혼재되어 있는 두 가지 양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하나는 식민주의, 제국주의와 함께 근대의 역사를 특징 짓는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간에 발생된 각 국가 간에 놓여진 “경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사회∙문화 교류의 비약적 증대이다.

근대 국가의 성립은 개별 국가를 하나의 독립적인 단위로 인정하고 타국과의 경계를 구분짓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국가 단위의 경계지움은 개별 국가의 타국에 대한 자치권이라는 정치적 의미 이상의 다층적인 성격을 갖는다. 근대 국가는 민족주의와 결합됨으로써 근대 국민교육의 시스템과 문화적 기제의 재생산을 통해 그 구성원의 일상에서의 생각, 행위, 그리고 느낌에 이르기까지 침투하여 전면적인 통제력 행사를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달리 말하면 근대 국가의 국민은 하나의 강력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타민족∙타국가와는 차별되는 언어, 문화생활, 역사를 공유하고, 이를 통해 다시 서로의 유대감을 증폭시키도록 짜맞추어졌다.

일련의 학자들은 이러한 민족주의를 서구 근대화의 산물로 규정지음과 동시에 근대 민족국가의 완성을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인공물”임을 밝힘으로써 민족주의를 일종의 “신화”로 치환하였다. 이 신화의 내용 속에는 그 구성원들이 국가에 대해 단순히 제도화된 정치공동체 속에서 의무와 권리를 갖는 국민(citizen)의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동일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믿게끔 하는 다양한 문화적 담론과 상징들(예를 들자면, 애국가, 국기, 국가적 영웅, 국가를 단위로 하는 역사기술)의 생산을 통해 그들이 속한 국가를 도덕적∙이성적 소속감을 넘어 충성과 희생의 목적 혹은 대상으로 여기게끔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적 단결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독일의 유태인 학살 등에서 보이 듯, 그 경계를 넘어서는 자들에 대한 강한 배타성이라는 비극적이고 비이성적인 현상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러한 비극은 근대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반성은 비단 비극적인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만이 촉진된 것은 아니다. 민족주의의 정점을 지나 1970년대부터 학자들은 국가라는 행위자 이외의 다층적 행위자들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실천하고 있는 다양한 활동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국가 내의 자급자족적 경제를 대신하여 민간의 경제주체들이 주도하는 국가 간의 무역 및 화폐유통의 증대, 출판물의 전지국적 유통, 국제전화,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상호교환, 현대의 교통수단이 제공하는 인적 교류의 증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합법적∙비합법적인 이주의 폭발적 증가는 국가 구성원에 대한 통제를 약화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초국가적인 교류의 증대는 더 이상 국가가 국제무대에서 자국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행위자일 수 없음을 증명하여 주었다.

그러나 초국가적 현상의 증대가 현대인의 마음 속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민족주의를 쉽사리 약화시키지 못하고 있음이 다양한 사회현상에서 확인된다. 국가 대 국가의 스포츠 경기를 통해서, 그리고 외국에 수출된 국내 기업의 가전제품과 자동차를 통해서도 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하기 이전에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믿게끔 하고 있다.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러한 ‘사실’이 대중매체를 통해 대부분 여과없이 유통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지 않는 운동선수들이나 한국 기업의 선전에 대해 왜 독립된 주체로서의 내가 일정한 공감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달리 말하면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리고 어떠한 근거로 “우리”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 속으로 침투하였는지에 대한 반성은 비교적 미약하다.

그렇다면 이 민족주의와 초국가성의 혼재에 대한 반성은 어디서부터 출발하여야 하며,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시켜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초국가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그 구체적 접근 방법은 다양하다. 현상적인 수준에서, 예를 들자면 초국가적 이주에서 어떤 국가로부터 얼마나 많은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는지를 면밀히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관련 정책 입안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적인 수준에서 과연 국가란 무엇이며, 어떠한 국가가 좋은 국가이며,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들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반성하는 것도 민족주의와 초국가성이 혼재한 현 상황에서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수불가결하게 답해야 할 질문들이다. 또한 역사학의 입장에서 민족주의와 초국가성의 과거 전개 양상을 탐구함으로써 현재의 상황을 상대화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마련하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와 아울러 생각해야 할 바는, 현대처럼 서구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과연 동북아시아의 전통과 경험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어떠한 긍정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지역 내의 전쟁과 분쟁, 갈등으로 얼룩진 동아시아의 근대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쉽게 도출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민족주의 정착 이전인 전근대 시기에는 어떠했을까? 흔히 이 상태를 중화주의에 바탕을 둔 국제질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과거 동아시아의 사상은 과연 국가를 어떻게 정당화하였으며, 그 존립의 목적을 어떻게 규정하였을까? 동아시아 사상계를 구성한 유가, 불교, 도교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개별적 인간의 본성적 가능성에 정초되어 있었으며, 이는 민족이나 국가를 경계로 하는 집단주의와 본질적으로 상반된다. 따라서 타민족이나 타국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는 반대로 세계동포주의적 입장이 강하다. 달리 말하면 동아시아의 사상적 전통은 개별적 인간의 정체성을 국가나 민족과 같은 외부로부터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잠재성을 인간 내면에 정초하였다. 따라서 현대의 초국가적 현상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사상적 전통 또한 민족주의에 의해 설정되어 있는 현재의 국가나 민족 간의 경계구분과 이에 따른 배타성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를 탄탄한 사상적∙역사적 근거 위에서 재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인문한국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2018년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정환 아세아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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