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문과대 철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소비하는 현상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서구와 다른 사유를 해 온 우리 사회가 남의 나라 고민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正義)를 명확히 정의할 순 없지만 부정의를 지우면 정의가 보인다.
 요즘 이 교수는 그의 유가철학 강의에서 부정의를 극복할 전통사상을 소개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소통의 원칙’이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도 유효하다고 설명한다. 이와 더불어 시대를 초월한 소통의 중요성과 유권자의 의무를 강조한다.
 지난 1일(수)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샌델의 함정에 빠져 ‘맥락 없는 개인’이 되어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가상의 사고실험 속 숫자놀음을 피하고 사회 속 우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현실의 정의에 다가설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정치에 무관심한 결과 ‘말 못하게 하는 사회’라는 수업료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승환 교수는 최근 ‘유가철학’ 강의에서 “우리 학계는 1920년대부터 줄곧 서구의 정의론을 소개하는데서 그칠 뿐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정의론을 형성하는데 인색했다”며 한국 철학계의 식민성을 개탄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열풍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떨까.

 

 

 -이 책이 아직도 베스트셀러다

 최근 몇 년간 시민들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부정의한 현실에 의분(義憤)을 표출할 계기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때마침 샌델의 책을 접해 빠져들었다. 이 열풍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부정의’에 대한 ‘관념적 해독제(ArmchairAntidote)’다.
 비판자에 대한 사찰과 겁박, 억압과 기소가 일상화된 현실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별다른 분출구를 찾지 못한 소시민이 책을 통해서라도 ‘정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냈다.
 하지만 국내의 독자들이 우리의 현실에 깔린 부정의에 철학적 메스를 가하기보다는, 오히려 미국 사회의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대리 고민’을 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진 | 황세원 기자 one@kunews.ac.kr

이 교수는 샌델의 사고실험이 근대 서양철학의 문제점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양 선로 위에 선 사람의 수를 알려주고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달려오는 탄광의 막차를 어디로 향하게 할지 묻는 식이다. 그는 강의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살피지 않고 단순히 ‘몇 명’이 서 있는지 따지는 게 실제 우리 삶과 얼마나 관련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가상의 사고실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말한다면

 이런 사례에서 공리주의를 택하면 칸트주의의 대원칙인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게 된다. 칸트주의를 택하면 다수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없게 된다는 역설을 말하기 위해 샌델은 이런 사례를 든다. 이런 방법으로 공리주의나 칸트주의 같은 근대윤리는 완전치 못한 윤리이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옹호하는 공동체주의로 독자들을 끌고 가는 전략을 편다.
 사실 이런 가상의 사례는 계약론을 방법론으로 채택하는 자유주의자에게나 어울릴 전략이
다. 공동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샌델이 자기 입장에 충실하려면, 추상적인 숫자놀음보다 ‘역
사’와 ‘서사’ 그리고 ‘맥락’과 ‘관행’에 충실한 구체적 사례를 들었어야 했다.

 -평소 한국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을 외려 같은 틀에서 역설적으로 비판한다

 한국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분배 정의와 복지를 반대한다. 그들은 정의와 공정, 공평이나 평등과 같은 단어를 시기심이나 질투에서 비롯된 원시적 본능이라며 비웃는다. 그래서 ‘덕’이나 ‘연대감’ 같은 고상한 말로는 이들을 설득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차가운 사람에게 차갑게, 따뜻한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태도가 ‘비례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자유지상주의의 원조 격인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이론을 빌려서 그들의 주장을 격파하고자 전략을 바꿨다. 오랑캐의 힘을 빌려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이다.
 노직의 정의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최초 소유물의 취득 과정은 공정했는가’, ‘소유
물의 이전 과정은 공정했는가’를 따지고 만약 두 과정에 불공정이 있었다면 시정돼야 한다는 ‘부정의의 시정 원칙’이다. 나는 자유지상주의의 대부인 노직의 이론을 빌려 그들이 주장하는 ‘무제약적 소유권’ 주장에 심각한 논리적·윤리적 결함이 있음을 밝히려 한다.

 -‘우리의 정의’를 찾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정의를 탐구하는 일은 꼭 사회나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위해 또는 내 후손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우선 내가 피부로 느끼는 부조리, 내게 가장 큰 해악으로 다가오는 부정의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접근해야한다. 정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서로 연관된 지적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 문제에 대한 명료한 분석, 실현 가능한 대안의 모색이다.
 물론 인식·분석·모색 등의 과정에는 철학적 사고,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등이 고루 있어야 한다.

특정 사회에 정의가 구현되려면 정치가 정의로워야 한다. 또한 우리의 정의를 찾기 위해선 우리의 지적 토양을 살펴야 한다. 이승환 교수는 이를 위해 조선과 같은 군주제 사회에서 오늘에 못지않게 소통을 강조한 이유를 설명한다.

 -군주제 사회에서의 소통 원칙이 현대 민주주의사회에서 유효한가

 정치의 기본단위는 ‘말’이다. 만약 정치의 장에서 ‘말’이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폭력뿐이다.   ‘소통’은 꼭 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모든 시대 ‘정치의 장’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던 항목이다. 유가에선 군주에게 소통의 대가가 되도록 요구했다. 유가에서는 소통에 능했던 고대의 군주를 성왕(聖王)이라 부른다. ‘성(聖)’은 커다란 ‘귀(耳)’를 가진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입(口)’에 귀를 대는 모습을 상형한다. <중용>에서는 특히 순(舜) 임금을 경청의 리더십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보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의 민주사회에서는 오히려 ‘소통’이 두절되고 비판자에 대한 사찰과 겁박이 난무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최근 강의에서 민초(民草)의 말은 물과 같다고 했다. 지금 물은 어떻게 흐르고 있나

 동양 고전의 하나인 <국어(國語)>에는 주(周)나라 말기의 폭군 려왕(厲王)이 비판자를 감시
하고 불통의 정치를 자행하다 결국은 권좌에서 쫓겨나는 고사가 있다. 이 책은 백성의 말이 물길과 같아서 이를 막으면 둑이 터져 많은 사람이 죽게 되듯이, 말을 막으면 결국 커다란 정치재난이 벌어지게 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양식 있는 시민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지금은 불통과 암흑의 시대다. 헌법에 기본권으로 명시된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물론이고, 심지어 과학적인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마저도 색깔론에 의해 마녀사냥 당한다. 그동안 우리가 쌓아온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말해주는 사례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면, 우리가 이런 반면교사(反面敎師)를 통해 민주주의의 소중함에 대한 수업료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정치현실을 ‘후불제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지 않는가.

 -평소 대학생 투표의 중요성을 ‘필요’에서 끄집어내 강조한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얼간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idiot은 그리스어 idiotes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공적인 삶에 아무 관심도 갖지 않고 사적인 관심사에만 매달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민주사회에서 부정의한 현실을 바꿀 유일한 방법은 정당이나 정권에 대한 투표다.
 ‘남들이 대신 투표해주겠지’ 또는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투표의 의무를 방기하면 결국 손해 입는 사람은 유권자 자신이다.
 나는 투표가 시민의 권리임과 동시에 의무라고 생각한다.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국가의 운영을 소수 이익집단의 손에 맡겨 버림으로써 자칫하면 ‘도적 지배체제(kleptocracy)’로 귀결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대학생이 idiotes처럼 개인적인 스펙 쌓기에만 몰두할 뿐 공적인 삶에 아무 관심도 갖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학부생 시절의 지적 훈련방법을 조언해달라

 학부시절에 나는 특정한 철학자나 사상가에 몰두하기보다 내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구체적인 문제를 풀어보려 노력했다. 하나의 문제를 붙들면 동양철학이건 서양철학이건, 사회학이건 정치학이건, 현대 이론이건 과거 이론이건, 닥치는 대로 탐독하며 끝없이 그 문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현실과 유리된 공부는 죽은 공부다. 유가에서는 학문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공부란 자기를 위한 공부라는 말이다.
 물론 스펙 쌓기 위한 공부도 자기를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단지 도구적 수단일 뿐 진정 나 자신의 삶과 영혼을 위한 공부라고 할 수는 없다.

 -강의를 통해 학부생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조선 유학자 정응은 “선비는 나라의 원기”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원기가 없으면 죽은 몸과
같듯, 나라에 선비가 없으면 그 나라는 망한 나라와 같다는 뜻이다.
 대학생은 옛날로 치면 선비에 해당하는 신분이다. 지조와 결기를 가지고 어두운 사회를 밝혀주는 일이 선비의 역할이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은 너무 스펙 쌓기에만 몰두하여 선비라고 불러주기가 민망한 시대가 되었다. 기성 사회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대신 기성 가치에 안주하고, 기성체제의 부정의를 비판하는 대신 기득권층에 편입하려 안달하는 모습만 보인다.
 물질적 성공을 위한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부정의에 대한 도덕적 분노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지 않다.
 영혼 없는 졸부들과 파렴치한 정치인들이 한국사회를 주도하는 한 우리는 결코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설 수 없다. 이 점에서 나는 우리 대학생들에게 장차 자신이 몸담을 사회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것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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