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생활이 4년 가까이 되어 가지만 아직 적응 못한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가장 힘겹고 불편한 두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 이곳 사람들의 시간 개념과 관료주의를 들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승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관료주의에 대해서는 더 긴 지면이 필요할 터이니 오늘은 시간 개념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에 대해서만.

이들의 문화를 쉽게 재단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어쩔 수 없이 불평하게 될 때가 있다. 하루 종일 시간표는 꽉 차 있는데 진척이 더디다고나 할까.
 
우남에서도 학부의 경우 수업 시작은 아침 일곱 시부터인데 마지막 수업은 밤 열 시에 끝난다. 물론 오전, 오후로 편한 시간을 나누어 수업을 들을 수 있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다른 행정적인 일을 보아야 할 경우가 참 난감하다.
 
어떤 곳은 두 시에서 다섯 시까지 점심 시간, 어떤 곳은 두 시에서 네 시까지, 다른 경우는 열 시에서 열 두시까지만 업무를 본다든가 하는 식으로 창구마다 일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하루에 한 가지 일을 끝내면 괜히 횡재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창구에 뭔가 증명서를 떼러 가거나 했을 때도 긴 줄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여러 사람을 식상하게 한 이후 효율이니 경쟁력이니 하는 말에서는 왠지 저항감을 느끼지만 이런 순간에는 ‘비효율적이구만’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된다. 이 거대한 대학의 직원들 보름마다 일한 대가를 수표로 받기 위해 긴 줄을 서고 수표를 지불한 다음날의 행정은 반쯤 마비된다고 보아도 좋다. 은행에 가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어야 하니까. 물론, 은행의 줄도 만만치 않다.
 
멕시코 사람들에게라도 이런 시간 낭비가 쉽게 받아들여질 리는 없건만 한국 사람들만큼의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럭저럭 수업 시간이 지켜지는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당연히 시간과 관련한 언어도 현지에 맞게 변용된다. ‘지금’을 뜻하는 ahora라는 스페인어 단어는 ahorita(바로 지금)라는 더 작은 느낌의 단어로(축소사라고 한다) 많이 쓰는데, 멕시코 사람들이 집게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을  귀엽게 내밀면서(마치 우리가 ‘아주 조금’을 표현할 때처럼) ‘ahorita’하고 말하는 것은 '좀 있다가'라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같은 스페인어를 쓰는 다른 라틴아메리카인들도 가끔 황당해 할 정도이다.
 
예를 들면 관공서에 가서 무슨무슨 일 때문에 왔다고 말하면 담당자가 이 귀여운 제스처와 함께 ‘ahorita’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 순간에는 사전적인 지식이 통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미소로 고맙다고 말하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걸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개인적인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한국인 선배는 약속에 상습적으로 늦는 과친구들과 거리를 두다 보니 일본인 친구만 남더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는데 개인적인 약속보다 더 난처한 건 집에 식사나 파티 초대를 받았을 때이다. 제 시간에 가면 초대한 식구들이 준비를 미처 끝내지 못한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함께 초대받은 사람들이 두어 시간 지나야 오기 때문에 멋적어졌던 경험이 있다. 특히 가정마다 독특한 시간 개념이 있기 때문에 초대에 관한 한 일반적인 코드를 완전히 터득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시간 개념이 아주 정확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이 사회에 대한 코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늦게 가는 게 예의인 곳에 일찍 가서 불평하지는 않는다. 유연하다고나 할까. 예를 들면 지도 교수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2주 후에 제출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이 한계를 정했다고 해서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 유난히 바둥거리지도 않는다. 2주 정도라는 거지 정확하게 오늘로부터 2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국인의 어려움은 그 허용의 한계를 모른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의 투덜거림에 대한 멕시코 친구들의 웃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한국인의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 또 시작됐어.”

옥영란(멕시코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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