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기본이고, 제2외국어로는 중국어지!’라는 틀을 깨고 스페인어에 푹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스페인으로 날아간 열정의 여인이 있다. 김소영(문과대 사회10) 씨는 2012년 1월 19일부터 4월 2일까지 스페인에서 생활했다. 여행도 아닌, 어학연수도 아닌 오직 그녀만을 위한 자유로운 생활기를 들여다봤다.

도착, 그리고 집구하기

수학 계기와 경비 마련
오랫동안 바라던 스페인 생활을 끝낸 지도 벌써 2달이 지났다. 친한 친구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친해지게 되었는지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스페인어, 그리고 스페인에 푹 빠지게 되었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전공생도 아닌데 스페인어를 공부한다고 하면 한결같이 ‘왜 스페인어냐’고 물어보는데, 사실 나도 ‘왜 하필’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는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칫 무미건조하게 보낼 뻔 했던 내 1, 2학년 대학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부모님께선 내가 스페인어에 이렇게 몰입하는 걸 썩 좋아하시지 만은 않았다. 졸업을 하려면 전공 학점부터 채워야 할 텐데, 남들은 전공공부 하느라 바쁜 2학년 2학기에 전공과목 하나 없이 스페인과 관련된 교양 과목만 듣고 있었으니 사실 내가 부모라도 걱정스럽긴 할 것 같다. 이런 부모님의 생각은 이해할 만 했기에, 내 멋대로 가기로 결정한 스페인 행 경비까지 대달라고 하는 것은 다소 뻔뻔한 것 같아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과외를 하며 돈을 모으기로 했다.
 
수학 방법과 장소 결정
사실 해외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외국 대학에서 그 나라 언어로 강의를 들으며 그 수학 경험과 학점을 우리 학교에서 인정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본인 분야에 대해 공부하면서 언어까지 같이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처음엔 스페인에서 학교를 다니고 그 과정을 우리 학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전공이 서어 서문학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학교로부터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적었고, 사비 유학 뒤 그 과정을 인정받자니 경비가 너무 많이 들 것 같아 그냥 한동안 조금 긴 방학을 가지자는 마음으로 한 학기 휴학을 하고 사설 어학원에 등록을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못내 아쉬웠으나, 오히려 ‘자유롭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지역과 학원 선택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 원하는 어느 곳에서든 수학 가능 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어학원에 대한 정보를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은 유학원이었는데, 학기 중 틈틈이 유학원을 여러 곳을 뒤지며 지역과 학원에 대한 정보를 구했다. 내가 머물기로 결정한 곳은 스페인 제 3의 도시 발렌시아(Valencia)였다.

도착, 그리고 집구하기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숙소 형태는 ‘shared flat’이다. 집 한 채를 여러 명이 같이 쓰는 개념인데, 방은 개별적으로 쓰되 거실이나 부엌과 같은 공간은 함께 쓰는 것이다. 집이 서울이라 한 번도 부모님 곁을 떠나 나 홀로 집을 구해본 적이 없는데다가, 짧은 스페인어로 계약할 집을 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열흘에 걸쳐 약 예닐곱 군데를 돌아본 후에 결국 내가 지금 지내는 집을 계약하게 됐고, 동갑이지만 직장 2년 차인 프랑스 여자아이와 집주인이지만 직장이 마드리드라 주말에만 간간히 집에 오는 20대 중반의 스페인 여자아이와 살게 되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책임감과 사회성(?)도 기를 수 있으면서 나이가 비슷한 또래끼리 어울리면서 언어실력도 많이 향상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다가도 모를 스페인 사람들

일상
보다 계획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오전 시간은 어학원을 끊어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오후에는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니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해변이나 동네 바(bar)를 가는 등 휴가를 만끽했다. 스페인어 공부도 공부였지만, 그보다 큰 목적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스페인의 문화를 몸으로 느껴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원 수업 후 집에서 공부만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학원에서 계획한 수많은 활동 덕분에 두 달간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스페인스러운 문장, “NO PASA NADA”
스페인어 문장 중에 안부 인사를 제외하고 내가 이곳에서 가장 많이 듣고, 또 가장 좋아하는 말은 “No pasa nada”이다. 직역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의역하면 ‘괜찮아, 뭐 어때?’ 정도의 의미로, 문제가 생기거나 힘든 상황에서 하는 말인데, 스페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여유로운 태도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문장이 아닌가 싶다. 사실 생각해보면 문제는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걱정과는 별개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것이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이 아닌 이상, 낙담하지 않고 툭 털어버리고 문제를 해결할 제 2안을 생각하는 게 더 현명하다. 이 문장은 이곳에서 내가 힘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긍정적인 마음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로움을 선물해줬다. 이는 내가 스페인 생활을 하며 얻은 가장 큰 선물로, 한국에 돌아가 잃어버리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줄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알다가도 모를 스페인 사람들
발렌시아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LAS FALLAS 이다. 물론 스페인에 관심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LAS FALLAS는 스페인 3대 축제 중 하나로, 상당히 규모가 큰 축제이다. 일 년 동안 지역 단체 별로 제작한 거대한 인형을 길거리에 전시한 뒤 심사하여 시상하고, 매일 곳곳에서 정부, 기업 및 지역단체가 각각 주최하는 여러 행사 등이 거행되는 등 짧게는 한 주에서 길게는 2~3주 동안 축제기간이 지속된다.

▲ 광장 속 여유로운 발렌시아 시민들.

내가 발렌시아를 선택한 이유에는 LAS FALLAS를 보기 위함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2월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는 구시가를 가득 메우는 대규모 시위대를 보면서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성났는데 과연 축제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웬걸, 바로 다음날인 3월 1일,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축제 기간 시작을 알리는 MASCLETA라 불리는 (색상 없이 소리만 내는)폭죽 행사를 보러 나온 사람들로 광장은 가득 찼다. 나로서는 다소 의아한 점이 있었지만, 이렇게 시위는 잊히는 거구나 싶었다.

FALLAS 축제가 사실 경제적으로만 봤을 때는 이익보다 손실이 많기에(20여 일에 걸쳐 막대한 돈을 들여 불꽃놀이를 거행하고, 골목마다 설치되는 FALLA라 불리는 인형을 제작하는 데에는 상당한 돈이 들지만, 막상 관광수입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은 고작 숙박비와 식비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이곳 시민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축제를 하는 게 결코 달갑지 않게 여겨질 것 같은데 사람들은 신나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축제가 끝난 열흘 뒤인 29일, 스페인 전국적으로 대규모 파업과 시위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지하철은 한 시간에 한 대 운영되었고, 많은 상점이 문을 닫고 사람들은 이 날 하루 동안 소비를 하지 않는 등 파업 또한 상당히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시내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오후 6시경 집에 걸어가는 길에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시위 규모도 축제 전 못지않았다.

물론, 매 순간 즐기기를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이고, 또 축제는 축제고 시위는 시위라지만, 글쎄,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현재에 충실할 수가 있을까 싶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스페인 사람들인 것 같다.

얻은 것

얻은 것
홀로 타지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빡빡한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배운 것이 많다. 물론 스페인어는 이전보다 월등히 늘었고, 문화적 지식도 얻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 동안의 나는 어떠했고, 앞으로 내가 어떤 자세로 가져야 할지 등 향후 내 일상에 도움이 될 만한 소소한 깨달음을 많이 얻은 것 같다.

두 달 반 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삶에 대한 나의 자세. 앞에서 언급했듯이, 휴학을 하고 이곳에서 지내기로 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 괜히 시간을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곳에서 지내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되기는 할까, 단지 한 순간의 충동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학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의 이런 고민들은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페인에 오기 위해 자기가 그 동안 누리고 있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들과 비교해보면 나는 여기에 오기 위해 투자한 거라곤 한 학기의 시간밖에 없는데, 대체 뭘 그리 스트레스 받으며 고민했던 건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인생은 긴데 난 뭘 그리 조급하게 생각했던 걸까.

또 한 가지 크게 얻은 것은 내 전공 공부를 이어나갈 동력. 사실 이 곳에 오기 전 까지, 전공 선택에 회의감이 많이 들었다. 물론 처음엔 마냥 흥미로워 보여서 선택한 사회학이었지만 사실 한 학기 전공 강의 듣고는 금세 흥미를 잃었고, 심지어 그 다음 학기에는 전공 강의를 하나도 수강하지 않고 전공 선택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혀 지냈다.

하지만 이곳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며 보다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사회학은 분명 ‘나의 수많은 궁금증과 밀접히 관련된 학문’이었고, 분명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바쁜 일상에 치여 미처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축제와 파업을 거치면서 이 지역을 비롯한 스페인 사회의 전반적 구조와 사람들의 의식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이런 관심이 과연 사회학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스페인을 향한 것인지 사실 조금 헷갈리기는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다 생각되는 것은 사회학을 공부하는 것이 수많은 나의 궁금증을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이고, 또 내 관심이 무엇을 향한 것이든 적어도 사회학을 공부할 충분한 동기를 얻었다는 것이다. 다음 학기 나는 내 전공 강의를 신나게 들을 준비가 되었고, 이번 일을 통해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이곳에 오기까지 했던 고민들은 대체 왜 했는지 스스로가 가소로울 정도로 배운 것이 많다. 고작 두 달이었지만, 지난 2년 대학을 다녔을 때 보다 더 많이 성장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김소영(문과대 사회10)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