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항구
백석에게 통영은 특별하다. 백석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는 해안가에 위치해 북쪽에서 드물게 섬이 많아 통영과 닮았다. 때문에 백석은 통영을 보며 고향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만 통영은 온화한 기후를 가졌다는 점에서 백석에게 북쪽의 고향과는 또 다른 따뜻함을 건넸다. 무엇보다 통영은 백석이 사랑한 여인 박경련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백석은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여러 차례 드나들면서 세 편의 시를 남겼다. ‘통영’이라는 세 편의 시를 엮어 통영으로 기행을 다녀왔다. 

▲ 백석이 앉아 시를 썼다는 충렬사 돌계단
‘녯날엔 통제사統制社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嬉라는 이름이 많다’
통영에 도착하자마자 옛 삼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인 통제영을 방문했다. 현판에는 병기를 씻는다는 뜻의 세병관(洗兵館)이 쓰여 있다. 이는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에서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는다’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통제영이 있는 곳이라 하여 통영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곳은 과거 군사 중심지이면서 고급문화가 발달한 부유한 도시였다. 문화해설사 김광자(여․58) 씨는 “통제영을 중심으로 임금과 관리들이 쓸 물품을 납품하는 고급 수공업체가 발달해 통영은 부유한 도시였다. 부로 인해 여유로운 삶을 누리게 된 사람들은 문화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는 통영에 많은 문화인을 배출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통영 할머니들은 기자를 천희라고 불렀다. 충렬사 쉼터를 운영하는 박정연(여․48) 씨에게 ‘천희’가 무슨 뜻인지 묻자 처녀라고 답한다. 백석도 통영에 내린 순간 젊은 여자들을 ‘천희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시에 등장한 천희를 두고 백석이 사랑한 여인 박경련을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백석이 좋아하는 여자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백석의 ‘천희’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통영 천희의 일편단심에 대한 애정이었을까.
백석은 천희를 어느 오랜 객주 집에서 만났다고 서술한다. ‘마루방에 생선가시가 널린 오랜 객주집’이라는 장소는 항구 근처에 위치했다는 것과 동시에 예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백석이 천희를 만나고 머물렀던 객주집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름조차 사라진지 오래인 객주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당시 서울에서 알 정도로 유명한 장소로 많은 문인들이 방문했던 객주였다는 ‘새미집’은 지금은 유흥가 가운데 위치한 작은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미집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 큰 항아리에 막걸리를 담아 팔던 곳을 의미한다. 새미집을 찾아 헤매는 내내 통영에서는 온통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세병관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통영2를 읽다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가는 백석의 들뜬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때문에 기행의 형태로 그리움과 사랑의 열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뛰어난 시적 구조를 갖춘 연시(戀詩)라고 평가된다.  
백석은 그의 절친한 벗인 허준의 결혼식에서 박경련을 처음 만났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던 백석은 그의 동기인 신현중과 함께 축하연에서 합석을 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박경련을 만나게 되고 그 순간 통영이 온전히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박경련을 만나러 마산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가는 길, 저 멀리 통영이 보인다. 배에서 보이는 통영의 모습은 마치 통영의 특산품인 갓의 모양과 같다. 백석은 같다를 갓다로 표현해 ‘갓잡은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고 해 갓을 세 번 반복해 여행의 흥취를 돋운다.
정주 출신인 백석에게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은 생소했다. 대구는 남해에서만 잡히므로 대구를 건조시키는 풍경은 진기한 장면이었다. 이 대구는 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도 등장한다. ‘내 어여쁜 사람이…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는 구절에서는 이뤄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씁쓸함이 나타난다. 시에서 등장하는 ‘내 어여쁜 사람’은 박경련으로 추정되는데 그녀는 백석의 절친한 친구인 신현중과 결혼한다. 백석이 박경련의 집에 혼담을 건넸을 때 박경련의 어머니는 통영 출신인 신현중을 통해 백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박경련의 집안에서 백석을 탐탁지 않아한다. 신현중은 그 틈을 꿰차 박경련과 결혼하게 되고 백석은 그 충격으로 인해 신문사를 그만두고 함흥으로 떠난다.
충렬사 돌계단에 앉으니 난이, 즉 박경련이 살았다는 마을인 명정골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백석은 이 돌계단에 앉아서 박경련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시를 썼다고 한다. 이제 백석 대신 충렬사 앞에 통영2 시비가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은 명정샘을 바라보며 서있다. 기록에 의하면 박경련의 집은 명정골 396호에 위치한 큰 기와집이라고 돼있는데 지금은 여황로 291번지로 주소가 바뀌었고, 바뀐 주소에서 박경련의 옛 기와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대신 동백나무와 명정샘만이 남아있다.

▲ 통영대교에서 바라본 판데목

‘열니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백석이 박경련을 찾아 통영을 방문했을 때 박경련은 집에 없었다. 대신 박경련의 외사촌 서병직이 백석을 맞아 통영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줬다. ‘서병직씨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백석이 통영을 안내해준 서병직에게 여행을 잘 다녀왔다는 뜻으로 편지 형식으로 보낸 글이다. 백석은 지역의 토산품을 통해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드러내고자 했는데, 이 시에서는 통영장의 물건들이 등장한다. 장에서 물건을 구경하던 백석은 술 한 병을 받아들고 선창으로 향하는데 여기서 그의 낭만적인 풍모를 엿볼 수 있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화륜선을 구경하던 백석은 달빛이 비치는 판데목에서 나룻배를 탄다. 달빛 아래 나룻배를 타는 정경은 옛 시조 속 풍류와 낭만을 나타낸다.

▲ 통영 중앙활어시장
통영대교에서 판데목을 바라보니 유유히 흘러가는 물결이 항구로 이어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예로부터 통영에 문학인이 많은 데에는 아름다운 풍경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판데목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통영 시내로 나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사람들은 단양팔경이 아름답다고 찾아다니지만 통영에는 그런 곳이 백 개도 넘는다고 말한다. 그런 곳에 가면 시도 쓴다며 시를 적은 수첩을 보여주는 아저씨의 모습에서 백석이 왜 통영에 매료됐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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