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호(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7월 1일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새로 발굴된 그의 작품을 실은 <백석 문학전집1,2>를 발간했다. 최근 백석 탄생 100주년과 맞물려 백석과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다. 새로 발굴돼 전집에 실린 작품은 뛰어난 번역가이자 예술성을 중시한 아동문학가로서의 백석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0여 년 동안 백석 작품 발굴에 매진해온 최 교수는 “백석은 연구할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어떤 작품들이 발굴됐나
“이번 전집에는 기록상에는 존재하지만 실물이 확인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발굴해 실었다. 백석 후기의 아동문학인 <집게네 네 형제>는 러시아의 레닌도서관에서 찾았다. 이 밖에 <단풍>, <등고지>, <천년 이고 만년 이고.....>, <조국의 바다여> 시 4편과 산문도 발굴됐다. 또한 중국 북경도서관에서 노벨상 수상작인 러시아 작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의 번역본을 찾아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방 이후의 백석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번역 작품이 대거 발굴됐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지낸 백석은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창작활동보다는 번역활동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요한 돈강> 번역본은 일본어를 거쳐 이중번역한 것이 아니라 백석이 러시아어에서 한국어로 직접 번역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일본 청산학원 유학 시절 러시아어를 배운 백석은 직접 가르칠 만큼 능통했다고 한다. 백석의 번역 작품을 보면 외국 작품인데도 향토적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그만큼 백석이 우리말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해방 이후 백석은 번역활동과 함께 아동문학에도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백석이 아동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역시 해방 이후 시기다. 분단 이후 고향 정주로 돌아간 백석은 북의 과잉된 정치적 이념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의 문학적 예술성을 지키기 위해 아동문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백석은 ‘나의 항의, 나의 제의’ 등의 문학 평론을 발표하며 아동문학을 예술성보다는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려는 열성당원들에 대항하기도 했다. 이처럼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려던 백석은 다른 문인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결국 이를 계기로 예술성이냐 사상성이냐 하는 아동문학 논쟁에 휘말려 백석은 당의 ‘붉은 편지’를 받고 숙청을 당하고 만다”

-해방 이후 백석의 행보가 얼마나 중요한가
“해방 이후부터는 백석의 암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백석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해방 전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따뜻한 시를 써내려갔던 시기의 백석부터 해방 이후의 작품번역과 아동 문학 집필에 집중했던 백석까지 전체 모습을 다 봐야 그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가능하다. 백석은 비록 고향을 떠나 만주를 방랑하면서도 아버지를 회상하는 시를 쓰며 가족을 그리워했다. 백석의 현실은 늘 떠도는 것이었지만, 그의 꿈은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공동체 지향과 방랑 사이에 모순이 있지 않나
“백석은 평생을 한 군데에 정착하고 살지 못했다. 고향 정주를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일본, 만주, 함흥 등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는 유랑 중 늘 시를 썼는데, 특히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에 관한 시를 많이 썼다. 비록 외지로 돌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족’ 자체를 동경하고,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던 사람이었다. 방랑하는 삶을 살면서도 머물던 장소에서 향토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시로 나타났다”

-시인 백석을 어떻게 바라보나
“백석은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시인 중 한 명이다. 김소월과 한용운, 정지용과 이상 사이에 있는 백석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서정시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는 김소월이 구사하는 민요적, 정지용이 구사하는 이미지즘적인 세계들을 종합해서 자신만의 토속적인 시 세계를 그려냈다. 시의 색채, 소재는 굉장히 향토적인데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모더니즘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백석의 시는 단어들의 나열로 이뤄지는데, 이 단어들이 결합되면서 시적인 긴장감과 공감이 생긴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고향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어법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됐다”

타지에서 만난 의원(議員)에게서 아버지를 떠올리고, 고향을 꼭 닮은 통영에 가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던 백석이었다. 그는 비록 혼자 살아갔지만 항상 사람으로 북적이는 삶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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