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은 백석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올해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12년에 백석은 평안북도의 해안가 마을인 정주에서 태어났다. 김억, 소월, 춘원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이중섭 같은 근대 최고의 서양화가를 길러낸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같은 고장서 소월보다 10년 뒤에 태어나 그의 체취가 물씬 배어있는 오산학교에서 그를 흠모하며 시의 꿈을 키워나갔으며, 마침내 그를 넘어서는 최고 시인의 반열에 우뚝 올라섰다. 한때 ‘국민시인’이었던 소월의 자리를 이제는 백석이 차지할 정도로, 그는 오늘날 우리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백석의 탄생 100주년은 그를 기리고, 그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축제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은 분단 후 북쪽에 머물러 있었던 관계로 오랜 기간 문학사의 이면에 가리어져 있었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보다 훨씬 뒤인 1980년대 초반에 접어들어 비로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3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일약 우리나라 최고의 ‘스타시인’이 되었다. 시는 예술의 일종인지라 흔히 시애호가들의 편애가 작용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백석은 여러 계층의 독자들로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아마추어 시 애호가와 전문적인 시인들, 그리고 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랑을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 가운데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시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옛날’을 경험한 바 있는 구시대 독자들은 물론, 그러한 경험이 전혀 없는 신세대 독자들에게까지도 큰 공감을 주는 매우 희귀한 전파력을 소유한 시인이다. 이처럼 신비한 호소력을 간직하고 있는 백석 시의 매력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백석 시에 환호하고 있는가?

  백석 시 매혹의 원천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언어의 만화경’이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붙어 있는 개별적인 명명어들을 일일이 호명해 낸다. 그는 어떤 사물 전체를 아우르는 총칭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고, 각 종류별로 하나하나 붙어 있는 개별 사물들의 이름들을 시어로 사용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수많은 사물어들이 등장한다. 가령, 그는 ‘방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에, ‘맷방석’, ‘두레방석’, ‘햇츩방석’이란 구체적인 방석이름들을 시어로 사용한다. 각 방석의 생김새나 용도, 그리고 그 말의 기표를 시에 활용함은 물론이다. 또 ‘산골’이라는 말과 함께 ‘산골짜기’, ‘산곡’, ‘산속’, ‘산중’, ‘산지’, ‘산대’, ‘산모롱고지’ 등의 시어를 저마다 다르게 사용한다. 이들은 언뜻 보면 비슷한 말 같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뜻과 뉘앙스가 서로 다른 말이며 이러한 말들의 미세한 차이를 백석은 섬세하게 활용한다. 이러한 세부적 명명어의 사용으로 백석의 시는 우리말의 성찬을 이루며, 언어의 기표와 기의의 예리하고 풍부한 구사로 시적 표현의 질감이 매우 두텁고 깊게 느껴진다. 개별 사물에 대한 백석의 명명과 호명은 동식물명에서 더욱 깊어진다. 그의 시에는 종류별로 수없이 많은 동식물명이 등장한다. 새와 꽃과 나무를 비롯한 동식물은 시의 오랜 소재였는데, 백석의 시에서 그러한 자연물들은 새로운 시적 언어를 획득하다. 백석은 식물과 동물에 붙어 있는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하고, 또 이들의 특성과 생태를 시적인 형상화에 적용한다. ‘박각시(나방)’, ‘도루래(땅강아지)’, ‘팟중이(메뚜기)’ 등과 같은 미물의 수분(受粉)과 울음소리를 감지해 내는 백석의 시적 태도에는 박물학적(Natural history) 사고가 드리워져 있다. 당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근대 박물학의 성과가 백석의 시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백석의 시는 박물학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동식물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하다. 가령, 새소리를 나타날 때, 소월은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지저귄다고 묘사한 바 있는데(저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서산에는 해진다고/지저귑니다, <가는길>), 백석은 “덜거기(수꿩) 껙껙 건방지게 운다, <북신>”고 묘사한다. 까마귀가 지저귄다고 표현한 것은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지저귄다’는 말은 보통 조그만 새들이 잇달아 소리를 낼 때 사용하는 말인데, 까마귀는 그렇게 울지 않는다. 그러니까 소월은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정확히 나타내려고 하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운율을 살리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 반면에 톤이 높고 강렬하며 마치 포유동물이 내는 소리 같은 수꿩의 울음소리를 껙껙 건방지게 운다고 표현한 것은 놀랄 정도로 섬세하고 정확한 묘사이다. 백석은 박물학적 상상력으로 우리 시를 새롭게 업그레이드시켰으며, 그것이 오늘의 시인과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새롭고 강렬한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석의 시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황금만능의 혼탁한 세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그의 시가 크나큰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이 세상을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지껄한” 곳이라고 규정하고, 이 ‘더러운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삶의 맑고 아름다운 영혼과 높은 가치를 유리알처럼 투명한 언어로 노래했다. 그는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고 말하였다. 황금과 권력만을 쫓아가는 속된 세상에서 비껴날 때 그의 삶은 가난하고 쓸쓸하고 슬플 것이지만, 바로 그러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를 그는 세상의 순수한 이웃과 자연물들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가난하고 외롭고 슬픈 자에게 그의 시는 큰 위안과 용기를 주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 그의 시는 탐욕으로 얼룩진 자신과 이 세상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고형진 사범대 교수 국어교육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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