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한 지 1주일. 차량 주위로 수 십 개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탄이 땅에 떨어지면서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고 여기저기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 날 탈레반의 공격으로 김천호(48) 소령은 가까이 지내던 사병을 잃었다. 탈레반의 공습을 피해 깊숙한 지하 벙커에 숨기도 여러 번. 한번 지하벙커에 들어가면 반군의 공격이 멈출 때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이 계속됐다. ‘언제 쯤 이 벙커를 나갈 수 있을까’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를 붙잡아 준 빛 한줄기. 바로 가족이다.

재미교포 1.5세인 김 소령이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건 지난 2009년. 30여년 만에 밟는 고향 땅이었다. 미국행 비행기에 타기 전 흐르는 눈물을 감추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아내와 장성한 두 딸, 밤톨 같은 아들을 데리고 늠름한 군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주한 미군 용산기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미 공군 김천호 소령은 악수보다 경례에 익숙하다.

김 소령에게 애틋한 고향이었던 한국은 아이들에겐 언제나처럼 거쳐 가는 아빠의 복무지고, 또 다른 친구를 사귀어야만 하는 낯선 곳이었다. 아이들이 ‘우린 친구가 없다’고 불평하는 날이 여러 번. 김 소령과 아내는 그런 아이들에게 부모이기 전에 친구가 되어 줬다. “대부분의 군인 가족들이 마찬가지에요. 복무지를 계속해서 옮겨야 하는 직업 특성 상 가족이 인간관계의 전부가 됩니다. 친구가 없으니 서로서로 친구도 되주고”

이런 김 소령에게도 가정의 위계질서는 지켜야할 최우선 가치다. 둘째 딸에게는 얄미운 아빠일 테지만, 그는 딸 둘이 서로 다투면 잘잘못을 떠나 언제나 큰 딸 편을 들어준다. 둘째 앞에서 첫째를 혼내면 가정에서의 지위가 흔들린다고 본 것이다. 김 소령은 “위계질서가 무너지면 가정이 풍비박산난다”며 “아버지의 권위가 전제된 상태에서 위계에 따른 존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둘째를 나무라긴 했지만 뒤에서 첫째는 더 호되게 혼났다. “첫째로서의 지위를 인정해준 것뿐이지 네가 잘한 건 아니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둘째에게 가서 사과하고 아버지가 자신을 왜 나무라지 않았는지 설명하게 했죠”

20년 째 군 복무 중인 김 소령이 가지고 있는 최대 약점인 ‘직장과 가정에서의 역할 혼돈’은 부인이 견제한다. 김 소령은 “장교 생활 몇 년 만 해도 ‘이거 해. 저거 해’하는 명령형 말투와 태도가 몸에 익어 집에서도 헷갈린 적이 많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아내가 눈치를 줘 그가 잘못을 깨닫게 만든다. 김 소령은 “우리 가정의 군대화를 막은 일등공신이 지혜로운 아내”라고 했다.

그런 아내는 김 소령이 아프간에서 군복무를 한 8개월 여 간 사지에 있는 남편 걱정 때문에 몸무게가 20kg이나 빠졌다. 가족의 걱정은 김 소령에겐 마음이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가족이 최우선이긴 하지만 국가에 대한 헌신이 그에겐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김 소령은 “오랜 군 생활을 위해선 사명감이 필수”라고 말했다.

김 소령의 가족은 서로 간에 편지를 자주 주고받는다. 가족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김 소령의 평소 생각 때문이다. 김 소령의 큰 딸은 대학 합격 직후 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아빠가 우릴 위해서 이제 까지 일해준 것에 감사하고 또 사랑합니다” 김 소령은 또 “아직 글을 잘 모르던 막내가 도화지에 ‘I LOVE YOU’하고 써주니 참 기뻤다“고 했다.

김 소령은 “내가 아침에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은 가족”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로 사는 것은 김 소령이 군인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하게 해주고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김 소령은 “가족은 내가 끌어야 할 수레고 나를 보호해 주는 방파제”라며 “나의 넘버 원!”하고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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