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가 봄날 햇빛 아래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춤을 춘다. 짧은 비마중이 끝나고 늦봄이라기 알맞은 따스한 날씨에 취해 오랜만에 신문사 동기와 꽃구경을 나섰다. 동기와 함께 저기 보이는 송아리진 꽃을 닮았다는 신문사 사람 얘기에 웃으며 짐짓 그 애 예쁘더라, 하고 입을 여는 순간 멈칫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연신 기수와 생김새를 되풀이하다 6개월 이상을 함께 보냈는데 이름 하나 기억 못하냐며 동기에게 타박을 들었다.

  바람을 쐬기 위해 어느새 봄꽃이 만개한 길을 걷다 보면 짧은 새 수많은 호칭을 듣게 된다. 부장님, 사장님, 언니, 교수님… 분명 그들에겐 예의를 갖춘 정중한 표현이겠지만 반가운 사람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입술 사이에 아련히 맴도는 한 마디가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전공 강좌인 러시아어 회화 수업에서는 ‘교수님’이라는 호칭 대신 교수님의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른다. 덕분에 ‘발렌찌나 아나똘리예브나’ 교수님의 수업에서는 교수님과 학생이 나란히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이따금 연출되기도 한다. 러시아인들에겐 이름 부칭 성을 함께 불러 주는 것이 어떤 직함으로 부르는 것 보다 고마운 최고의 존칭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만을 위한 이름과 아버지의 성함을 동시에 불러주는 것만큼 기분 좋은 칭호가 또 있을까.

  우리 사회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 직함과 호칭이 발달한 사회다. 사람 사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을 거란 생각도 가끔은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각자의 독특한 향기를 호칭이라는 하나의 유리병에 뒤섞어 가두는 건 아닌가 싶다. 때로는 직책을 넘어 그 사람 자체의 향에 한껏 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그들이 우리에게 시나브로 스며들어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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