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무릉도원은 상상의 세계가 만들어 낸 곳이지만 아르카디아는 그리스 중부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위치한 초원으로 실존하는 곳이다. 아르카디아가 처음으로 서술된 것은 그 지역 출신 시인 폴리비오스가 로마에 망명해 16년을 지내면서 자신의 고향을 담은 <역사>에 의해서다. 그는 아르카디아를 ‘무지한 목동들이 사는 황량한 곳이며 그 지방 사람들은 힘겹고 고단한 삶을 보내고 있다’라고 묘사했다.

  고단한 삶을 대변하던 아르카디아가 축복의 땅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시인 베르길리우스에 의해서다. 베르길리우스는 <목가>에서 목신을 ‘아르카디아의 신’으로 추앙하면서 아르카디아를 음악을 창조하는 목동들이 가득한 풍요의 땅이자 시와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장소로 묘사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범우주론적 개혁설이 새롭게 관심을 받게 됐다. 이에 베르길리우스가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 아르카디아가 재창조되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아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구원, 즉 희망이 된 것이다.베르길리우스가 만들어낸 신화를 현실화시킨 작품이 푸생의 <에트 인 아르카디아 에고 2>다. 제목의 ‘Et in Arcadia ego(심지어 아르카디아에서조차 죽음이 존재 한다)’라는 문구의 유래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에트 인 아르카디아 에고2>는 푸생의 두 번째 작품으로 풍요로움을 강조했던 첫 번째 작품과 달리 시대 를 초월한 이상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에서는 세 명의 목동과 한 명의 여인이 해질녘 숲속에서 아무런 장식도 없는 묘비를 가운데 두고 있다. 그중 두 명의 목동은 몸을 구부려 묘비에 적혀 있는 비

▲ <에트 인 아르카디아 에고2>-1647년, 캔버스에 유채, 85*121.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문을 가리키고, 한 명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서 있는 여인은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목동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그들을 지켜보고, 목동은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다른 목동의 그림자를 가리키고 있다.무릎을 꿇고 앉아 비문을 읽고 있는 목동의 팔 그림자는 비문 위에 낫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데 낫의 뾰족한 끝부분은 ‘아르카디아’를 가리키고 평평한 부분은 ‘에고’ 라는 낱말을 덮고 있다. 낫은 죽음을, 그림자는 윤곽 안에 있는 문구의 전설적인 근원을 상징한다.

  니콜라 푸생<1594~1665>의 이 작품에서 비문에 적혀 있는 글을 가리키고 있는 목동은 아르카디아라는 지명을 발견한다. 하지만 아르카디아의 발견은 동시에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한다. 즉 목동들은 언젠가 스스로 죽음을 인식하여 아르카디아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목동들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이미 문구를 알고 있으며, 그녀가 목동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모습은 그들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인은 시대의 형상으로 푸생은 아르카디아의 기독교적 계시를 나타내기 위해 여인을 무녀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단테의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를 중재자로 등장시켰던 것처럼 푸생은 그녀를 통해 베르길리우스의 이야기와 기독교의 예언이 하나가 되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박희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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