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포되고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이론들이 있는가 하면, 이론이 생산된 지역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이내 사라지는 이론들이 있기 마련이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담론의 권력의 이면에는 그 이론들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지정학적 배경도 고려되어야 하며 이러한 근대학문과 지식권력의 전 지구적 확산은 비서구권 학자로 하여금 근대성 자체의 속성과 그 이면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지적하게 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에서 강의하는 철학자 엔리케 두셀은 이러한 근대성이 비서구적 타자를 은폐시켰다고 진단하고, 같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미국의 듀크대학에서 문화연구를 강의하는 월터 미뇰로는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을 통해 서구의 식민주의적 번역이 삭제하려던 식민주의적 차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서구와 비서구를 넘나드는 경계사유 border thinking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는 경계사유에 대한 필요성으로 비서구의 영지 gnosis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원래 영지는 신에 대한 지식을 의미했으며 초대 기독교 세계에서 이성이나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의미에서의 신비로운 지식을 일컫는 개념이었다. 그리스어 동사 gignosko(알다, 인식하다)와 epistemai(알다, 익숙해지다)는 지식과 알게 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암시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억견과 인식의 차이는 잘 알려져 있는데, 전자는 상식의 안내를 받는 지식유형을 가리키고, 후자는 2차적 질서의 지식, 그러니까 명백한 논리법칙의 안내를 받는 지식을 가리킨다. 영지는 비밀스럽거나 숨겨진 지식을 가리킬 필요성에서 생겨났다.
미뇰로는 발레틴 무딤베가 쓴 <아프리카의 발명: 영지, 철학, 그리고 지식의 질서>(1988)를 소개하면서 영지라는 개념을 무담베가 쓴 이유는 철학과 인식론이라는 식민지의 훈육된 인식방식에서 하위주체의 지식으로 전락해버린 여타 훈육되지 않은 지식형식들을 다루기 위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여기서 영지는 아프리카의 전통사유 뿐 아니라 이 지역을 서구화하기 위해 들어간 사람들이 생산한 지식, 그리고 아프리카에 관련된 미디어가 생산한 지식의 복잡성을 파악하기 위해 전통과 근대, 서구와 아프리카라는 범주를 뛰어넘는 지식생산을 개념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미뇰로나 무딤베에게 있어 영지라는 개념은 인식론과 해석학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폭넓은 앎에 대한 탐구와 더 높고 비밀스런 지식을 총칭하는 것으로써 억견과 인식을 넘어 근대/식민 세계의 내부 경계(서구의 내부에서의 헤게모니 다툼)와 외부 경계(서구와 비서구 간의 문제 혹은 신식민/탈식민 문제) 모두에서 나오는 지식 생산에 대한 성찰을 다루기 위해 사용되었다. 초대 기독교 세계에서 영지가 자아의 신비에 대한 직관이나 계시의 경험과 관련되어 합리적 논증이나 이론적 설명보다는 내적 관조와 신비의 체험과 관련된 실천적 프락시스를 중요시했다는 점에 주목했기에 근대와 근대가 빚어낸 식민주의적 세계체제의 권력과 논증적이고 변증법적인 지식체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통칭으로 채택되었다.
경계사유는 서구와 비서구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서구의 합리적 이성과 비서구의 영지적 지식 혹은 지혜이성이라는 서로 다른 코드를 이해하고 로컬 히스토리와 글로벌 디자인이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자체를 중시한다. 또한 글로벌 디자인이라는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비서구권  뿐만 아니라 서구까지 망라한 지역 역사들 간에 길항하는 역학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보정되는 좌표축이다. 따라서 권력의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한 미뇰로의 처방은 비서구의 주체들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발성과 이를 서구에 번역을 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 지구적 시대에 있어 진정한 지역 간의 소통을 매개하는 글로벌 지식인의 덕목으로 학술 언어의 주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영어, 독일어, 불어 외의 로컬 언어를 습득하여 이러한 이중 언어를 바탕으로 경계사유를 할 수 있는 기본 토대를 닦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은 뒤셀의 해방철학과 탈식민주의 이론 그리고 하위주체 연구의 논점들을 망라하고 있어 오늘날의 문화연구의 현주소를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전거를 제시하고 있다. 문화론들의 다양한 쟁점들을 통해 그가 지향하는 경계사유에 대한 논의는 분과학문과 지식의 지정학, 식민지 유산, 젠더 격차, 인종 갈등에서 나오는 이론이면서 이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타자적 사유, 종속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서구와 비서구, 남과 북, 메트로폴리와 주변부의 경계와 국경을 넘어서는 전지구촌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있어서의 지난한 노정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이 책은 진정한 글로벌 리더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송상기 문과대 교수 서어서문학과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