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국진 교수가 정년퇴임 당시 제자들과 후배들이 선물한 본인의 청동흉상 앞에 서있다. 사진 | 조현제 기자 aleph@

 

“People are flowers, be gentle(사람은 꽃이니 부드럽게 대하라)”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문국진(의과대 의학과) 명예교수가 만든 슬로건이다. 1976년 9월 1일, 문국진 교수의 손을 거쳐 국내 최초로 고려대학교 법의학교실이 탄생했다. 인간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던 그를, 지난 27일 그의 서울 여의도 자택에서 만났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거짓 없이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법의학에 대해 물었다.

 

- 법의학은 어떤 학문인가
“사람에게 중요한 두 가지는 생명과 권리입니다. 흔히 사람을 치료하는 임상의학을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법의학은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잖아요. 하지만 법의학자하고는 말이 통하거든요. 죽은 사람이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법의학자가 해야 할 일이죠. 사인(死因)을 규명해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겁니다. 법의학이 처음 도입됐을 때는 ‘두벌죽음(두 번 죽음을 의미)’ 사상이 너무 강해 부검에 대한 반대가 심하기도 했죠.”

- 우리나라 법의학은 어떻다고 생각하나
“한국의 법의학은 학문적 수준으로만 본다면 세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제도가 원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 예로 우리나라는 아직도 법의관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 않아요. 사람이 죽으면 파출소에서 순경이 나와요, 그 순경이 타살로 판단하면 수사과 형사가 오고, 그 다음에 검사가 사인을 보고 부검여부를 결정하죠. 부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판사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야 부검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영장 없이 칼을 대면 사체손괴죄가 되기 때문에 총 5번의 승인을 거쳐야 부검을 시작할 수 있는 거죠. 법의관의 권리를 자율적으로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하루빨리 확립됐으면 싶죠.”

- 부검이 마지막 순서에 있는 것에는 어떤 문제가 있나
“대표적인 예로 경찰이 40일 만에 죽은 채로 발견된 유병언을 노숙자 변사사건으로 처리하면서 초동수사가 엉망이 됐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한 달을 방치하고 나서야 부검을 해달라고 하는데, 그 때는 이미 시체의 부패가 심해 부검이 이뤄져도 알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언론은 애꿎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만 탓하는데, 죽은 지 40일이 지나 홀랑 썩은 것을 갖고 무슨 재주로 사인을 규명하겠습니까. 미국의 법의관(Medical Examiner) 제도만 도입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데 답답합니다.

미국 법의관 제도는 신속하고 정확한 사인 규명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법의관 사무실에 바로 연락이 옵니다. 법의관이 사건현장에 나가면 피해자의 신장과 요건을 고려해 차 범퍼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피해자가 쓰러진 위치를 살펴보면 차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파출소에 무전을 해서 범퍼 위치가 몇 cm인 차 종류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또 우측 헤드라이트에 피가 묻어있는 차가 지나고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변사체를 싣고 부검을 하고 있으면, 파출소에서 범인을 잡아오는 거죠. 이런 제도가 법의학이 사회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건데, 우리나라 제도는 과연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제도가 맞는지 의문이 듭니다.”

- 법의학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키려 고려대에 법의학교실을 여셨다
“변사체 부검을 국과수에서만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법의학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고려대 故 김상협 총장이 한국에도 법의학 교실이 필요하다며, 국과수 법의학과장 임기가 끝나는 대로 고려대로 와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나 또한 법의학을 우리나라에도 보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1970년에 고려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시 법의학교실의 대상은 대학원생으로, 법의학교실을 만드는 데 여러 난제가 있었어요. 우선 법의학회를 만들어야 했는데, 주변학회인 병리학회의 동의가 필요했어요. 하필 병리학회에서도 임상병리가 분리되는 시기라 고민이 많이 됐죠. 결국 병리학회장을 10년 역임하셨던 이제구 교수님을 법의학회 초대장으로 모시고, 1976년 대한법의학회를 창설했어요. 이제 수업을 진행할 40시간을 확보해야 해서, 학과 수업을 진행하는 동문 교수들에게 양보를 구해 그해 9월 1일에 겨우 국내 최초로 법의학교실을 탄생시켰습니다.

법의학교실이 고려대에 만들어진 후, 법의학이 필요하다고 느낀 몇몇 의대에서도 법의학교실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현재 41개의 의대 중 12곳에 법의학교실이 생겼습니다. 고려대 법의학교실이 우리나라 법의학의 초석이 된 지 벌써 41년이 됐네요.”

- 법의관과 관련된 드라마도 꽤 나왔는데 무슨 생각을 했나
“드라마 ‘사인’을 보고 매스컴의 힘이란 이렇게 무섭구나 싶었습니다. 근 50권의 책을 썼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드라마 한편으로 50명의 지원생이 늘어난 것은 정말 높이 평가할 만한 것 같습니다. 내용이 조금 비약적인 면이 없진 않지만, 법의학은 생명을 바치더라도 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드라마의 결론은 훌륭했습니다.

내 호가 생각할 도(度)에 서로 상(相)을 따서 ‘도상’, 법을 생각하는 의사라는 뜻입니다. 대한법의학회에서 법의학을 보급하는 데 문화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에게 주려는 ‘도상 법의문화상’을 제정했습니다. 이런 시도가 우리나라에 법의학이 정착되게끔 시도하려는 움직임의 하나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드라마나 영화산업을 통해 자꾸 법의학을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 현재 사람 대신 책을 부검한다고 들었다. 책으로 부검하는 것이 사인을 밝힌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나

“저는 요새 법의학 가운데 미술하고 법의학하고 접목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국과수에서 물러나 부검을 직접 할 기회가 거의 없었잖아요. 그래서 사람에서 책이나 그림으로 부검 대상을 대체했을 뿐이죠. 통섭과학의 일환으로 세계적인 문화적 작품을 의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법의탐적학(法醫探跡學, Medico legal Pursuitgraphy)’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통섭과학의 일환으로 법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선 학문을 융합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부검할 때 시체를 해부하는 것처럼 책을 부검해 그 사람에 대한 사인을 밝히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법의학 지식을 가지고 그림을 보면 ‘이 기가 막힌 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으로 사인을 밝히는 게 가능하니까 시작한 것 아니겠습니까. 유명한 예술가들은 전기 작가들이 그들을 조사하고 연구해서 많은 기록이 남아있어요. 그때 당시 법의학적 지식이 확립되지 않아 사인을 밝히지 못했더라도 남아있는 문헌은 아직도 많습니다.

2009년에는 북오톱시(Book Autopsy)를 통해 ‘음악, 법의학자를 만나다’라는 시리즈 음악 콘서트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때 차이콥스키는 비소 독살, 베토벤은 알코올성 간경변증, 모차르트는 수은중독설, 슈베르트는 매독 등의 질병과 사인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 200년의 미스터리를 해결하셨다고 들었는데
“당시 가톨릭국가였던 스페인에서 커다란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던 ‘벌거벗은 마하’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직도 미제로 남아있습니다. 법의학자들에게 유골 감정까지 의뢰했지만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해결되지 못한 신원확인 사건으로, 법의학자로서 사명감을 갖고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생체정보연구팀의 도움을 받아 결국 2012년에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마하의 모델로 거론된 사람은 귀족 알바부인과 당시 실권자의 애인인 페피타였으나, 그때는 누구도 정확한 감정을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하와 알바부인, 페피타의 얼굴그림을 3차원으로 복원해 중첩 비교검사를 실행했습니다. 마하가 알바부인이라는 설이 유명했지만, 비교검사 결과는 페피타가 마하와의 유사성이 더 높게 나타났죠. 200여 년 이후에서야 알바부인은 불명예스러운 소문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법의탐적학인 접근을 통해 미술의 관점에서 공감각적인 방안으로 사인을 규명할 수 있었죠.”

- 법의학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들에게 바라는 점은
“의학을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문화적인 면에 눈을 뜬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생명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을, 법의학에서는 어질 인(仁)에 기술 술(術)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인술, 어진 기술이라고 합니다. 환자를 고치는 의사는 인술을 통해, 예술가가 한 작품을 완성시킬 때만큼의 노력을 들여야 해요.”

-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학생이나 현역들에게 정열을 가지고 자기 일에 미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학문을 숙달한 후 다른 분야를 접하면, 그쪽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의학은 실험을 하지 못하면 그대로 끝인데, 퇴임하면 더 이상 실험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체를 부검해 사인을 알아내는 것처럼 책으로 부검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운 좋게도 전 세계의 의사 중 단 한 명도 법의탐적학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 학문을 앞으로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접근방법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으면 좋겠어요.”

 

 

문국진 명예교수는 국내 법의학계의 선구자이다. 1925년 평양 출생으로, 진한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문 교수는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자이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창설멤버다. 고려대에 대한민국 최초로 법의학교실을 설립했고, 대한법의학회의 초석을 담당했다. 그는 35년간 법의학자로서 2,000여 구가 넘는 사체와 이야기를 나눠왔고, 퇴임 이후 현재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일본 및 한국 배상의학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 교수는 서울대 의과대학·대학원 의학박사, 미국 컬럼비아 퍼시픽 대학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 과장, 고려대 의과대학 법의학 교수 및 의학과 명예교수, 뉴욕대 의과대학 법의학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다. 법의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죽은 자의 권리를 말하다>, <법의학으로 보는 한국의 범죄 사건>, <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 <바흐의 두개골을 열다> 등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교양서를 집필했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