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중심주의 한국은 도시의 역사적 흔적을 보존하는 것보다 개발하는 것에 더 익숙했다. 서울 도심에서 옛 흔적이 남아있는 건축물은 많지 않다. 서울의 가옥 갱신주기는 서구도시보다 훨씬 짧아 30년 이상을 넘기지 못한다. 한국을 연구하는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2009년 저서 ‘아파트 공화국’에서 서울의 주거공간은 유동의 문화를 띄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동의 문화는 이미 지어진 가옥의 영속성에 집착하는 축적의 문화와 달리 시간의 빠른 순환을 중시한다”고 했다. 본교와 인접한 청량리동, 정릉동에는 50년 역사를 간직한 건축물인 부흥주택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 사진 | 조현제 기자 aleph@

 

삶의 흔적이 녹아 있는 청량리 부흥주택 단지
  부흥주택은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 후 생긴 심각한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정부와 서울시가 조성한 공영주택단지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부흥주택 단지는 동대문구 청량리2동 홍릉 단지, 성북구 정릉동 ‘정든마을’과 마포구 망원동, 이화동 낙산마을이 대표적이다. 부흥주택은 2층 높이로 지어진 흙벽돌집으로, 계획 단지인 만큼 각 집이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나열돼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대문구 청량리2동 203번지와 205번지 일대엔 1955년부터 50년간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홍릉 청량리 부흥주택 단지’가 있다. 홍릉 부흥주택 단지는 빌라 한 채 들어서지 않아 초기 주거지구조가 온전히 보존돼있어 단지 내의 개별 부흥주택에서 50년간의 한국 주택문화 변화상을 연구할 수 있다. 이는 특히 부흥주택의 화장실 위치 변화에서 잘 드러난다. 부흥주택 설계자는 서구식 주거형태를 한국에 들여오면서 화장실을 집 내부에 설치했다. 하지만 화장실이 밖에 있는 한옥에 익숙했던 한국인은 당시 실내에 있는 화장실에 거부감을 느끼고, 이를 바깥으로 옮겼다. 현재는 실내 화장실이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대부분의 가정에서 다시 화장실을 실내에 들여놓았다. 명재범(본교·건축학) 강사는 “부흥주택은 새롭게 들어온 주거 형식이 거주자의 관습과 요구에 의해 변형되는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말했다.

  홍릉 부흥주택 단지는 건물만큼 거주자들의 연령대도 높다. 70대 이상 고령 인구가 밀집해 있어 골목 곳곳에 노인들이 걷다가 쉬어 갈 수 있는 의자와 평상이 놓여 있다. 1m 남짓한 골목을 맞대고 사는 주민들은 집 앞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A(남·75) 씨 역시 이곳에서 50년째 거주하고 있어 부흥주택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변화상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소형차 한 대가 지나 들던 골목의 폭이 한 사람 지나다닐 정도로 좁아진 것 빼고는 50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바뀌지 않아 고향 같다”고 말했다. 

 

▲ 성북구 정든마을 부흥주택단지는 조금씩 빌라촌으로 바뀌고 있다. 사진 | 조현제 기자 aleph@

역사성을 잃고 있는 정릉동 부흥주택 단지
  “이사 왔을 때 집 꼴이 말이 아니었지. 흙바닥엔 구멍이 크게 뚫려있고, 벽도 다 흙벽이었고.  내가 퇴직금을 이 집수리하는데 다 썼어. 장판 깔고, 벽지 도배 싹 하고 말이야. 계단도 너무 가팔라서, 아이고 이거 못 쓰겠다, 싶어서 사람 불러가지고 계단도 고치고. 그래서 지금은 깨끗해. 살만해.”

  성북구 정릉동 ‘정든마을’에 1988년 이사와 30여 년째 살고 있는 김제민(남·83), 오희남(여·79) 부부의 부흥주택은 전형적인 부흥주택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부엌이고,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야 부부의 주 생활공간인 안방이 나타난다. 옆방은 안방과 미닫이문으로 연결돼 있다. 부부는 이곳 부흥주택에서 1남 3녀를 키워냈다. 2층엔 세 자매가 살았고, 1층 안방과 맞닿아 있는 방에선 아들이 살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와 내부 두 곳에 있다. 내부에 있는 계단은 자녀가 출가하고 2층에 세를 놓기 시작하면서 막았다. 부흥주택이 초기 모습과 달리 다가구주택이 되면서 생긴 변화다.

  서울시는 2013년 정릉동 지역을 ‘주거환경관리사업 구역’으로 지정했다. 1950년대 주거양식인 부흥주택과 도시 한옥이 아파트와 공존해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 사업은 노후건물을 전면 철거하는 개발방식 대신 마을의 역사성, 환경성 등의 보전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공공에서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개인에 기존 주택을 리모델링해 주거환경을 보전, 정비, 개량하도록 주택개량비용 융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정든마을 역시 2014년 골목바닥 도로포장, 하수관 정비, 벽화 조성 사업이 진행됐다. 

  주거환경관리사업 구역으로 지정된 후 동네의 모습은 급격히 바뀌는 현상이 일어났다. 과거 정든마을은 한옥, 1957년에 지어진 부흥주택, 90년대에 지어진 연립주택 같은 저층주택이 많은 전형적인 옛날 마을이었다. 현재 정든마을엔 1층이 필로티(주차장)인 신축 빌라가 들어서고 있다. 오희남 씨는 성북구에서 사업을 시작한 시점부터 오래된 건물이 팔리고 빌라가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층 부흥주택이 연속된 골목엔 5층 이상 신축 빌라 2곳이 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신축 빌라 하나가 들어서기 위해 부흥주택 네 채 정도가 헐렸다. 23동 있던 한옥도 5동으로 줄었다. 주거복지 민간단체 ‘나눔과 미래’의 전문수 활동가는 “성북구에서 정든마을을 재생지역으로 선정한 후 1년간 이러한 변화가 급격히 일어났다”며 “부흥주택에 살던 거주자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고, 빌라 단지에 30~40대 젊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기존 커뮤니티에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는 부흥주택의 개선보단 공공시설 정비에 지원금을 집중하고 있다. 부흥주택 관리를 위해 주택의 증축, 개축, 보수시 권장 성격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지만, 실효성이 없다. 주 거주자가 70대 이상 노인층이라 주택 개선에 큰 관심이 없고, 강제성이 없다 보니 집주인이 부흥주택을 보존하지 않고 빌라로 재건축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을 수 없다. 전문수 활동가는 부흥주택 단지가 빌라촌으로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봤다. 그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거주하시는 분들이 70대이기에 10년에서 20년 뒤면 부흥주택이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며 “부흥주택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한국전쟁 이후 정부 주도로 계획된 주택단지인 부흥주택은 골목이 일자로 반듯하다. 사진 | 조현제 기자 aleph@

도시와 개인의 역사가 담긴 부흥주택
  부흥주택은 서울 도심에 얼마 남지 않은 근대 건축물이다. 서울시는 부흥주택이 밀집한 이화동 국민주택 단지를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 미래세대에 전달할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자산으로, 부흥주택에는 사람들의 생활문화가 반영돼 있음을 주목했다. 명재범 강사는 서울시에서 ‘박제화’ 된 공간인 궁궐을 제외하고는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세월의 흔적은 도시 건축물에 남고, 이러한 흔적이 지층처럼 쌓일 때 도시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와닿는 것”이라며 “부흥주택만의 매력인 50년 전 과거와 현재의 삶이 중첩된 모습은 재개발하지 않고 살릴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부흥주택 단지는 한 마을의 정체성을 담당하기도 한다. 전문수 씨는 고층빌딩이 가득한 도시에서 저층 주택이 이어져 있는 부흥주택 단지의 모습은 독특한 정체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는 “높은 건물들을 보다 부흥주택 단지를 바라보면 시야가 탁 트이는데, 이것이 정든마을의 중요한 정체성”이며 “오래된 건물만이 갖는 추억과 향수 같은 정서가 있어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부흥주택을 재생해 활용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 청년소셜플랫폼 오늘공작소는 마포구 망원동 부흥주택을 개조해 작업공간으로 활용하는 ‘부흥주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14년 8월 부흥주택 4채를 임대해 1채는 공동작업장 용도로 사용하고, 3채는 재임대해 청년들의 생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은 부흥주택을 낙후됐다기보다는 ‘관리되지 않은’ 주택이라 보고 재생 과정에서 주택의 주거 가능성을 최대로 끌어내고자 했다. 한광현 연구원은 “집은 노후도에 상관없이 주거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건물이 오래되고 낡았으니 재건축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부흥주택의 재생 과정은 실제로 거주할 사람에게 어떤 공간이 필요할지에 대한 고민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오늘공작소는 부흥주택 프로젝트로 부흥주택의 물리적 재생뿐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작년에는 망원동 예술가와 주민들이 함께 즐기는 망원정 할로윈 축제를 기획했다. 한광현 연구원은 “주민, 예술인으로 구성된 각 구성체가 서로 협력하면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도시에 활력이 돌 것”이라 말했다.

 

논문참조: <청량리 부흥주택의 특성 및 변화에 관한 연구>(정아선, 최장순, 최찬환/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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