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세계경제포럼(WEF) 보고서는 10년 후 미래사회를 변화시킬 21개의 기술 중 하나로 블록체인을 꼽았다. 초연결사회와 집단지성 등의 미래 키워드를 제시했던 미래학자 돈 탭스콧(Don Tapscott) 탭스콧그룹 CEO도 "디지털 블록체인은 향후 30년을 뒤흔들 디지털 시대 키워드이며, 차세대 인터넷 핵심 기술로 모든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 일러스트 | 주재민 전문기자

  세계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에 위기의 조짐이 엄습하던 2008년 8월 18일, 누군가 bitcoin.org 도메인을 익명으로 등록했다. 그로부터 두 달 반 후인 10월의 마지막 밤, 암호학자들의 메일링리스트인 GMANE에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 라는 이름의 이용자가 ‘비트코인: P2P e캐시 시스템'이라는 제하의 소논문을 등록했다. 참여자의 익명성이 보장되고 중앙은행 등의 금융기관을 전면 배제하면서도, P2P 네트워크상에서 협업과 참여를 통해 이중지불을 방지하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분산컴퓨팅의 역사를 뒤바꾼 이 혁신적인 시도는 암호학자들과 해커들, 눈 밝은 정보기술 전문가들을 열광케 했지만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자리 잡게 될 지는 의문이었다.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이 암호화화폐 시스템의 이름은 비트코인(Bitcoin)이었고,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현실의 혹독한 검증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저주에 가까운 비관론도 이 새로운 글로벌 지급결제시스템이 지구적 생태계를 이루는 걸 막진 못했다.

  비트코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화폐단위로써 교환가치의 등락이라는 세속적 측면에만 그치지 않았다. 2015년을 경과하며 많은 금융기관, 심지어 각국의 중앙은행을 비롯한 공적 금융기관들까지 비트코인의 골간을 이루는 기술을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블록체인이라는 이름의 분산장부(distributed ledger) 시스템이다. 올 초 발간된 영국 내각의 보고서는 블록체인의 정의와 기본 메커니즘을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분산장부는 기본적으로 자산의 데이터베이스로, 여러 시스템, 구성원 그리고 기관들로 구성된 하나의 네트워크상에서 공유될 수 있다. 네트워크의 모든 참여자들은 각자 자기 고유의 장부 복사본을 가질 수 있다. 공유된 장부에 어떤 변경이 발생하면 그 내용은 모든 장부에 몇 분 내지는 몇 초 만에 반영된다. 장부에 기재된 에셋은 금융적, 법적, 물리적 또는 전자적일 수 있다. 장부에 기재된 에셋의 보안성과 엄밀성은 전자키와 전자서명에 의해 암호학적으로 유지되는데, 이것들은 공유된 장부 내에서 누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새로운 등재 내용은 하나, 여럿 또는 모든 참여자들에 의해서, 네트워크에 의해 동의된 규칙에 준거해 업데이트 될 수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는 블록체인을 분산원장(Distributed Ledger) 기술로 규정하면서, “거래정보를 기록한 원장을 특정 기관의 중앙 서버가 아닌 P2P(Peer-to-Peer)네트워크에 분산하여 참가자가 공동으로 기록하고 관리하는 기술을 의미”한다고 포괄적으로 설명했다.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딜로이트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유된 거래 기록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기술"로 정의한다. 아울러 기술의 총합이면서 공유된 기록 그 자체 또는 장부인 블록체인은, 특정한 네트워크상에서 모든 참여자들에게 분산되어 있으며 참여자들은 자신들의 컴퓨팅 자원을 이용해 거래기록을 유효화하고, 이를 통해 제3기관의 개입을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필자는 위와 같은 일반적 규정에서 기술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위변조 증거가 남는 분산 데이터 구조(Tamper-evident distributed data structure)’로 블록체인을 정의한다. 위변조에 대응해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참여적 컨센서스 메커니즘이 핵심적이며, 그 방식적 특성에 따라 블록체인의 종류가 상이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분산된 데이터의 무결성을 유지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디지털 에셋과 자료의 분배 및 공유, 메시징, 암호학, 컨센서스 등의 다종 기술이 집약된 복합구조로 이해할 것을 주문한다. 그래야 단순히 금융영역 뿐만 아니라 공급자망관리, 거버넌스, 컨텐츠 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 가능한 블록체인의 가능성을 제대로 조망하게 될 것이다.

  비트코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컴퓨터공학에서는 분산환경에서 ‘신뢰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1982년 레슬리 램포트 등 3명의 컴퓨팅 공학자들은 마이크로스프트의 의뢰를 받아 수행한 연구를 통해 ‘비잔틴 장군들의 문제’로 이를 정식화했다. 다수의 노드들이 참여하는 분산네트워크에서 합의와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가 항상 문제였다.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금융거래 같은 고도의 정확성과 보안성이 필요한 행위는 항상 신뢰를 제공하고 금융기관의 중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러한 통념을 깬 것이 바로 비트코인이었고, 그 핵심에는 기존의 분산컴퓨팅에 암호학을 결합시켜 문제를 해결한 블록체인이라는 프로토콜이 자리하고 있었다. 분산컴퓨팅 기술과 암호학의 결합은 분산환경에서도 ‘신뢰 네트워크' 구축이 가능하다는 것을 비트코인은 실체적으로 입증했다. 최초의 상용화 브라우저를 만든 인터넷의 선구자이자 현재는 실리콘밸리의 투자가로 활약하고 있는 마크 앤드리슨은 비트코인이 ‘신뢰가 작동하는 인터넷(Internet with Trust)’을 가능케 할 것이라며 열광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분산 환경에서 작동하는 ‘신뢰 네트워크’는 일단 가동이 될 경우, 중앙집중적인 시스템에 비해 보안성과 효율성이 매우 뛰어나기 마련이다.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한 곳에 보관/관리 한다면 해커들이 단 하나의 데이터베이스에 침입하는 것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데 반해, 블록체인처럼 분산된 데이터구조에서는 어디에 침입해야 하는 지조차 분명치 않다. 단일 실패점(single point of failure)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시스템에 오류 또는 성능저하가 발생하더라도 전체 네트워크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의 희박하며 쉽게 복구 또한 가능하다. 나아가 블록체인은 복잡한 거래 기록 관리 및 추적에 용이한 장점을 지닌다. 여러 기관이 참여하는 경우에도 시스템 통합에 따른 복잡한 프로세스와 그에 수반하는 고비용 구조를 우회하게 해준다. 블록체인을 통해 2022년까지 은행의 인프라 비용을 150~200억 달러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맥킨지, 2016)이 나오는 것은 이런 특성 때문이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신뢰 네트워크’를 구동시킨 최초의 살아있는 사례가 되었다. 실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비트코인의 뒤를 이은 새로운 퍼블릭 블록체인인 이더리움(Ethereum)은 이 신뢰 네트워크를 ‘프로그래밍 될 수 있는 신뢰 네트워크(Programmable Trust)’로 진화시키고 있다. 개별 거래에 프로그램을 삽입할 수 있는 블록체인의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 기능을 전면화해, 스마트 계약으로 구동되는 다양한 코드/프로그램이 지구적으로 분산-신뢰 네트워크를 이루는 플랫폼이자 하나의 거대하게 연결된 컴퓨터를 만드는 구상이다. 이더리움의 뒤를 이어 분산자율조직(Distributed Autonomous Organization)의 실험도 막 시작되었다. 블록체인을 이용해 비영리조직, 기업은 물론 정부까지 구성할 수도 있다는 야심찬 구상이다. ‘프로그래밍될 수 있는 조직(Programmable Organization)’의 실험에 전 세계적으로 이미 1천억 원의 자금이 몰려든 상황이다.

  이 같은 퍼블릭 블록체인의 실험과는 별도로, 세계적인 금융기관들의 블록체인 실험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골드만삭스, 제이피모건 등 투자은행들은 전 세계적으로 상업은행들까지 포괄, 40여개 넘는 은행들이 참여하는 블록체인 연합체를 구성했다. 미국을 비롯해 여러 국가에서 증권거래소를 운영 중인 나스닥 역시 블록체인 기반의 증권거래 시스템을 개발 중이고, 한국거래소(KRX) 역시 이 같은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블록체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실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많은 혁신가들이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 한다. 하지만 모든 혁신적인 기술은 기술 외적인 장벽과의 싸움도 이겨내야 비로소 현실에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는 사물인터넷이나 무인 자동차, 인공 지능 등 모든 혁신 기술이 처한 숙명이다. 블록체인에 있어서도 미래에 가장 큰 위협이 될 요소는 기술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일 사회 제도, 인간의 상상력 내지는 변화에의 의지 등이 될 것이다. 

 

김진화 한국비트코인거래소 코빗 공동창업자/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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