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축제 시즌인 5월, 이쯤 되면 학생들 사이에선 어떤 연예인 어느 학교로 오느냐가 화제가 된다. 각 대학의 전통성과 특색이 들어간 축제가 주를 이루기보단 어느 학교가 더 학생들의 관심을 끌 만한 연예인을 섭외하느냐가 그해 그 대학 축제의 성패를 나누기도 한다. 이에 과거 대학 축제의 의미를 되새겨보며 ‘대학 축제의 방향성’에 대해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진정한 대학 축제의 의미를 찾기 위해 본교 대동제의 역사를 조명해봤다.

 

▲ <1969년 5월 5일에 발행된 533호 고대신문> 본교 축제에서 학생들이 강강술래를 추고 있다. 사진 | 고대신문 DB
▲ <1985년 4월 29일에 발행된 996호 고대신문> 대동(大同)의 의미로 고놀이를 하고 있는 학생들. 사진 | 고대신문 DB

  본교 축제는 ‘석탑대동제’로 불리는데, 이 축제의 연원은 1962년 5월 4일 열렸던 ‘석탑축전’이다. 그 당시의 축제 프로그램은 강연회, 토론회 등의 학술행사와 포크댄스, 체육대회 등의 오락행사로 구성됐다. 이후 석탑축전은 매해 열리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전국 대부분 대학에 축제의 틀이 갖춰졌고 학교 축제가 열리면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교 인근 주민들도 참여했다. 이 당시 본교를 포함해 전국 대학 축제의 오락적 성격이 강조되고 축제 예산 중 연예인 초청에 의한 지출이 가장 많은 점 등으로 비판의 시선도 받게 됐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는 대학가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본교 축제에 한해선 1970년대까지는 1960년대의 오락적 축제 성격을 이어갔다. 정명갑(농업경제학과 76학번) 교우는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 이후 대학가는 상당히 움츠러든 상태였지만 축제 땐 연예인도 불렀고 중앙동아리 위주의 주점도 진행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의 본교 축제는 군사정권의 영향으로 인해 ‘횃불제’와 같은 시위적 성격을 띠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며 이전의 축제와는 다르게 오락적 성격이 줄어들었다. 이낙학(전산교육과85학번) 교우는 “80년대 중반엔 모든 학교 주요 행사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관점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정확히 관통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며 “대동제도 이와 많이 결합하는 형태였다”고 말했다.

  1984년, 본교는 전국대학 중 최초로 대학 축제의 이름을 일반 페스티벌 혹은 축전, 축제에서 ‘학생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대학문화 표출의 장을 만들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대동제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본교가 대동제의 개념을 사용한 이래 전국 대학들이 축제명칭이 줄줄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낙학 교우는 “학생회관 앞에서 무수히 많은 학우들이 모여 풍물패를 주축으로 하여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대동 놀이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난다”고 말했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 말엔 본교 축제 기간 동안 5.18 등과 관련된 정부에 대한 비판 게시물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대학을 다녔던 한 교우는 “그 당시엔 캠퍼스에 가수가 오는 건 생각도 못 했던 시기였다”며 “대동제 마지막 날에는 학생시위를 했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축제의 틀은 1990년대에 확립되기 시작했다. 민속적인 요소와 정치적 색채 등이 사라지게 되고 대중문화 축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터, 주점, 연예인 초청 등 오락성이 있는 행사가 축제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90학번의 한 교우는 “91년 이후 과거의 운동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노는 문화로 분위기가 변화됐다”고 말했다. 이로써 기존의 대학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축제현장에서도 허물어졌고 이 모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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