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연세대 연희관에서 <유토피아> 출간 500주년을 맞아 ‘낙원에 대한 기억, 혹은 미래에 대한 희망’ 학술대회를 열었다. 1부에선 유토피아에서 그려진 공동체에 대한 묘사와, 그것이 실제로 서구 사회에서 어떻게 표현됐는지에 대한 발표가 진행됐다.

▲ 사진제공 |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이상적 공동체의 실현

이종수(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는 곧 공동체에 대한 논의”라고 말했다. 유토피아에는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모든 사유의 원형이 들어있다. 유토피아의 공동체는 공간의 설계, 도시의 규모, 집의 모양, 도로, 공원 등 공간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이웃관계, 대의체제, 노동과 배분, 재산, 심지어 남녀 간의 결합까지의 모든 구상을 담고 있다.

유토피아는 현실 너머에 있을 때 완전한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의 모사(模寫)로서 현실에서 구현한 경우도 꾸준히 있었다. 1530년대에 도미니카의 바스코 데 키로가(Vasco de Quiroga, 1470~1565)는 파츠콰로 호 주변의 인디언들과 함께 모어의 유토피아 원리를 실험했고, 전원도시 운동의 시초인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Robert Owen, 1771~1858)은 1812년부터 1817년까지 스코틀랜드의 조그만 마을인 뉴 라나크(New Lanark)를 운영했다. 오웬은 노동자들을 빈곤과 범죄로부터 탈출시키고자 뉴 라나크를 2400명이 규모의 공동체로 발전시켰다. 여기선 가구당 채마밭이 하나씩 제공됐고, 당시 15시간 노동이 관행이던 사람들에게 10시간 노동을 유도했다. 또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복지가 주어졌으며 기업은 상당한 이익을 창출했다. 20세기 이후의 생활공동체 운동도 다양한데, 스코틀랜드의 핀드혼, 아미쉬 공동체 등이 대표적이다. 이 교수는 “모어의 유토피아적 공동체에 대한 꿈은 그를 죽음을 넘어 오늘날까지 생존케했다”고 말했다.

 

건축물로 나타나는 유토피아

유토피아 사상은 서양의 건축물에서도 나타난다. 18세기 말 이전까지 유토피아 도시 모델은 대개 정사각형이나 원형 같은 완전한 기하학적 형태나 격자형의 르네상스 이상도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유토피아는 단순히 기하학적 모양의 도시건축이 아니라, 사회문제에 대한 이상향을 제시하게 됐다.

유토피아 공동체를 위한 건물을 가장 구체적으로 제안한 사람은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다. 그가 구상한 농촌 공동체는 1500~1600명의 인구를 갖는 팔랑스(phalanx)가 기본단위인데, 여기에선 모든 생산과 소비가 공동으로 이뤄진다. 고댕의 ‘파밀리스테르(familistère)’라는 노동자주택단지는 푸리에식 공동생활체 거주지인 팔랑스테르(팔랑스의 건축단위)의 건축모델이 실현된 사례다. 프랑스 기즈(Guise)라는 마을에 1858년부터 20년에 걸쳐 세워진 파밀리스테르는 탁아소, 보육원 등의 양육시설과 당구장, 카페 등 노동자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일이 끝나면 노동자들은 공장운영이나 주거방식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노동자 주거문제가 심각했던 시대에 파밀리스테르는 집합적인 노동자 주거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사례였다. 이 공동체는 1968년 해산될 때까지 100여 년 가까이 유지됐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자본주의적 계획과 관료주의가 범람하면서, 건축에선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 이탈리아 역사학자 타푸리(Manfredo Tafuri, 1935~1994)는 “유토피아의 비전을 제시하는 건축의 역할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끝이 났고, 종교, 가족 등 공동체적 삶의 제도도 약해졌다”며 “건축이 ‘유토피아 없는 형태(Form without utopia)’가 된 것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결과”라고 말했다. 이상헌(건국대 건축학과) 교수는 이러한 타푸리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교수는 “단순히 디자인을 통해 유토피아적 희망을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필요한 것은 건축의 생산체계 속에 개입해 새로운 공간을 생산하고 확장해가는 자발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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