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각진 두툼한 책들이 벽을 채우고 있다. 탁자 위에 법전 같은 책들이 무겁게 쌓여있다. 양현아 교수는 딱딱함과 무거움 속의 법학, 각진 남성 위주의 법학계에서 여성을 담아내는 법여성학을 연구해왔다. 인터뷰 내내 그간의 기억들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때론 격앙된 어조로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는 법을 통해 인간의 깊숙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법여성학은 어떤 학문입니까
  “법여성학은 여성의 관점에서 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요즘은 남녀 모두의 관계 문제를 중요시한다는 의미에서 젠더법학이라는 말을 쓴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정의와 평등 문제도 젠더법학의 연구주제가 된다. 성소수자, 빈곤자, 장애인, 제3세계 소수자들을 포용할 수 있는 법학을 소수자법학이라고 한다. 여성주의 법학은 이런 소수자법학의 대표주자 격이다. 법여성학에서는 여성주의적 사고로 법학을 다시 해석하고 재구성하며 비판한다. 누구의 입장에서 쓰인 법인지, 이 법이 생각하는 개인은 누구인지를 고려해 법을 재검토하는 것이다.”

 

-법여성학은 언제부터 연구되기 시작했나요
  “1960년대 미국에서 뉴레프트 운동(신좌파운동)이 일어나고 진보적인 사회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 정의와 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시에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는 인식과 함께 개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정치적 논의가 나타났고 이것이 법학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1970년대에 법이 사회의 남성중심주의를 반영하고 있어 만인에 대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에 여성이 주체가 되는 법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요구에 여성주의 법학분야가 형성됐다.

  한국에선 1980년대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1990년대 문민정부가 세워지면서 시민사회에서 페미니즘운동이 성장했다. 1980년대 말부터는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특례법, 남녀고용 평등법 등의 법제화운동이 화려하게 일어났다. 특히 가족법 개정운동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운동으로, 1990년대부터 동성동본금혼법이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나는 등 큰 틀에서 개정되면서 법학이 페미니즘의 주요 관심사가 됐다. 또한 반(反)성폭력 운동, 2000년대 본격적으로 전개된 호주제 폐지운동 등의 흐름 속에서 페미니즘적 요구를 법학 내에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남성중심의 법, 판결, 관념에 대해 여성주의적 관점을 적용한다고 들었습니다
  “호주제 폐지가 대표적 예다. 호주제는 여성의 권리를 매우 침해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를 중심으로 한 가계계승’의 중요한 전통적 목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옹호돼왔다. 

  호주제도 하에서 이혼한 여성들은 기존의 남편 호적에서 나와야 하지만, 친권과 양육권이 있는 자녀들은 남편의 호적에 남겨둬야 한다. 때문에 성본과 호적이 다른 엄마와 자녀들은 훗날 해외유학 등 법률적 상황에서 전남편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이 같은 제도는 여성을 부차적인 존재로 바라도록 하고, 여성의 혼인·이혼·재혼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했다. 나는 이게 과연 정말 한국사회의 전통인지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호주제에서 가계승계 전통은 조선시대 전통이 맞지만, 남성위주의 가계승계는 일제 식민지배 당시 전해진 일본의 호적제도의 잔재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이 결정적인 근거가 돼 헌법재판소에서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낙태는 형법상 범죄 행위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미혼으로 아기를 낳아 기르기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낙태를 선택한다. 낙태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여성이 혼자 아기를 낳아 기를 때 국가와 공동체가 주거·양육 등의 지원을 해주는 등 통합인권적인 측면에서 권리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은 신체적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출산과 성에 대한 양성 평등권, 자녀양육 등을 위한 공적 지원 요청권 등으로 구성되는 포괄적인 인권의 틀이다. 이는 최근에 도입된 개념으로, 출산장려정책과는 다르다. 출산장려정책은 인구정책과 관련돼있지만, 재생산권은 여성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존재로서의 권리를 사회적 시스템을 통해 보장받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많은 정책과 법안에서 재생산권이 언급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법여성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위안부는 식민지 시대 일본군대가 만든 체계적 강간시스템이다. 그런데 한일협정,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1940년대 전후 군사재판 등 전쟁범죄에 대한 논의에서 위안부 범죄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남성법학자, 남성정치지도자들은 이 문제가 강간, 매춘의 문제이며 전쟁 범죄의 부차적인 것으로 봤다. 그래서 많은 국제협약, 평화조약에서 위안부와 같은 전시강간이 크게 문제시 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와서야 전시 강간이 우연적 사고가 아닌, 전쟁 수행의 일부였다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 먼저 공개적으로 위안부에 대해 문제제기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다. 국제법의 맹점을 폭로한 사건인 동시에, 유교문화에서 성폭력 피해여성이 자발적으로 세상 앞에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아시아 피해국 10개국 간의 협력과 대화의 결과로 2000년 도쿄에서 여성국제전범법정이 열렸다. 이 법정에서 그동안의 국제법과 국제조약에 내재한 남성중심주의가 비판받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 당시 유효했던 법에 근거해서 일본군 위안부가 당시 형법에 위배된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는 당시 법을 여성주의적으로 재해석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위안부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젠더사건이다. 많은 국가와 단체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공론화 됐다. 2011년 헌법재판소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한일협정과 별도로 개인들의 청구권이 있다고 확인하는 배상청구권 확인 판결이 있었다. 그 결과가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다. 그런데 이 합의는 부족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잘못된 합의다. 2011년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하고 동시에 잘못의 공적 인정, 배상, 역사기록,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한국 외교부는 일본정부와 협상하면서 10억 엔으로 한 번에 이 모든 문제를 합의해버렸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돈 10억 엔을 받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해버렸다. 피해자가 원하는 부분이 돈이라고 단정 짓고, 그동안 진행돼 온 정의의 문제와 이념을 모두 망가뜨려버렸다. 합의 이후 위안부 관련 역사연구, 유엔재발방지대책 진행 등에 차질이 생겼다. 일본은 심지어 소녀상까지 이전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본적 사실을 중심으로 한 학술연구조차 차단해, 정부지원을 받는 관련 조사연구까지 중단됐다.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합의내용을 준수하고 확대해석하는 동안, 일본은 망언을 멈추지 않고 있다.”


 
-여성도 군대에 가야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남성만 군대를 가는 것이 여성에 대한 ‘수혜적(benign)차별’이라고 한다. 수혜적 차별이란, 그 차별로 인해 혜택을 받는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이 군대를 못 가게 됨으로써 박탈당하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군대는 사회화와 교육의 기능을 일부 담당하고, 일종의 시민권 획득의 기초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또 대부분의 남성은 군대를 가고, 대부분의 여성은 군대경험이 없다는 것은 여성이 폭력에 취약함을 의미한다.

  노동법에 진정직업자격(BFOQ)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직무에 있어서 특정 성(性)이나 인종이 꼭 필요하면 사업주가 왜 그런 게 필요한지 증명해야 차별이 아니게 된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남탕에는 남성만 고용하는 것은 BFOQ에 해당되지만, 승무원을 여성만 뽑는 것은 타당한 근거가 없으므로 BFOQ에 해당되지 않아, 남성 승무원도 뽑아야 한다. 이 개념을 군대에 적용해 보면, 국방부가 군대의 특정 보직에 남성만 뽑아야 하는 이유를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설명되지 않는 보직의 경우에는 여성도 뽑아야 한다. 현재 한국은 여성의 경우 부사관 이상 자원입대만 허용하고 있고, 일반병사로 입대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 것은 헌법에 부합하지 않는다. 더 이상 국가가 여성보호를 이유로 남자만 군대에 가야한다고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당장 여성도 군대에 가도록 하자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제도적 연구를 통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양현아(서울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여성학 분야의 전문가다. 한국젠더법학연구회 운영위원장, 제3대 한국젠더법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국가인권위 비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법무부 가족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 한국여성학회 대외협력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원을 지냈고,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남북한공동기소단에서 검사로 재판에 섰다. 현재는 인본군위안부연구회 초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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