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본인제공

하와이 물류회사에 취업한 신혁수 씨 

신혁수 씨(남·27)는 하와이의 한 물류기업에 취업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근무하는 회사는 중국 현지에 소유한 공장에서 수 천여 종류에 달하는 제품을 컨테이너로 들여와 리테일 업체에 판매하는 일을 한다. 트럼프의 자국민 우선주의와 맞물린 시기에 외국인인 그가 하와이에서 취업에 성공한 것은 운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취업을 위해 그가 걸어온 길에는 운을 만들어 내기 위한 철저한 노력들이 깔려있었다.

신 씨가 과감하게 해외취업에 도전했던 이유는 모험적인 경험으로 안목을 넓혀나가기 위해서다. 주위로부터 다소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인생에 형용하기 힘든 가치를 더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인 2016년 8월, 해외취업 에이전시 비용마련을 위해 한 대기업 유통업체에서 인턴 일을 했다. “일이 금방 구해질 줄 알고 그 해 12월 말 250만원이라는 비용이 다모이자 마자 인턴 직을 바로 그만뒀어요.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250만원까지 합쳐 총 5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갖다 냈는데, 3월 달까지 공채정보하나 물어주지 않는 에이전시가 원망스럽기도 했죠.” 공백기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지원서를 넣은 한국의 물류 중견기업 2곳에서 입사제의를 받았지만 지금의 회사로부터 연락이 오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하와이행을 택했다.

신혁수 씨가 해외취업에 성공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현지 경험’이다. 하와이에서의 약 6개월간 교환학생 체류경험과 현지 마케팅 회사의 3개월 인턴 경험은 회사 면접관들이 그의 업무적응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도록 일조했다. 이외에도 신 씨는 언어와 자격증을 취업의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으로 꼽았다. “해외로 취업하는 만큼 그 나라의 언어능력 역시 중요해요. 현지인 수준만큼은 아니어도 자신이 취업하고자 하는 국가에 맞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풀어나갈 정도의 능력은 필수적이죠.” 그 밖에도 오픽 AI, 토익 890, 물류관리사, 유통관리사, Mos Master, 지게차 운전면허증 등 그가 한국에서 차근차근 준비했던 자격증들이 해외취업에서도 빛을 발했다. “사실 업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진 않아요. 하지만 지원자의 능력을 입증할만한 증거자료로 면접관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하죠.”

그는 하와이에서 일과 일상생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신혁수 씨는 한국과 하와이의 가장 큰 차이가 ‘삶다운 삶’에서 온다고 말했다. 야근도 없고 의미 없는 회식자리도 없다. 오직 정시퇴근만이 있을 뿐이다. 오후 5시에 일이 끝나면, 그는 오롯이 자신의 일상을 즐기는데 몰두한다. “와이키키해변에서 수영을 하거나, 산책하면서 운동을 하는 등 여가시간을 충분히 누리고 있습니다. 요즘은 일드와 미드에 빠져 살아요.” 이러한 여가는 한국과 대조적인 하와이의 기업문화 덕분에 가능하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업무만을 할당해요. 업무가 몰릴 시 새로운 인원을 고용해 직원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요.”

그는 하와이에서 취업을 원한다면 전공 살리기를 고집하기보다 채용인원이 많은 일자리를 우선적으로 탐색할 것을 조언했다. “첫 번째 면접을 보기까지 8개월이 걸렸고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 작용했기 때문이었어요. 급한 분들에게는 채용수요가 많은 여행사, 관광, 요리 부문 직렬을 추천하고 싶어요.” 또 에이전시를 통할 경우 서류준비절차가 확실히 간편해지긴 하지만, 많은 비용이 부담되기에 두 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것을 당부했다. “개인적으로 모든 해외취업 비용을 감당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학교나 정부의 지원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캐나다에서 헬스트레이너로 근무중인 최아랑 씨 

최아랑(여·43)씨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헬스체인점인 ‘굿 라이프 피트니스’에서 퍼스널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다. 올해 초 그녀는 캐나다 전역에서 가장 훌륭한 퍼스널 트레이너 500명 안에 뽑혔다. 30대 중반에서야 캐나다로 건너간 40대의 동양인 여성이 거머쥔, 드물고 귀한 이력이다.

그는 한국에 있을 당시 잘나가는 영어과외 교사였다. 매달 300만원이상을 벌던 안정적인 생활을 버린 이유는, 영어가 너무 좋아서였다. “25살 때 1년간 체류했던 영국으로 언젠간 다시 돌아가겠노라고 항상 다짐했는데, 한국에서 해가 바뀔 때마다 기회를 자꾸 놓치는 것 같아 스트레스 받았어요.” 마침 캐나다에서 지내던 지인이 2009년에 그녀를 초대했다. 영국과 같은 영어권인 데다가, 느낌이 나쁘지 않은 나라였다.

“솔직히 무대포로 왔어요. 학생비자를 받으면 이곳에 남는 거고 못 받으면 다시 한국에 와서 과외를 해야겠단 생각으로 관광비자를 받아 왔죠.” 주변에서는 30대 후반의, 혈혈단신 여성인 그가 캐나다에 남지 못할 확률이 크다고 했다. 공부를 위한 영어학원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보 네트워크를 위해 3개월짜리 토플학원을 끊었다. 그는 결국 학생비자를 얻는데 성공했다.

한국인이 없는 곳에 살아야 캐나다에 온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토플학원,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다니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는 생활에 익숙해졌을 때 쯤 학교를 다니기로 결심했다. 돈만 주면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곳에는 관심이 없었다. 합격 난이도가 꽤 있고, 건강관리학과로 평판이 좋은 전문대에 입학했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폭삭 늙었어요.” 학과에 한국인은 최아랑 씨 단 한명 뿐이었다. 졸업 후 진로인 퍼스널 트레이너는 고객과의 상담이 주된 업무일정도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굉장히 중요한 직업이었다. 그녀는 분초를 쪼개, 통학으로 토론토의 동서를 가로지르며 공부한 결과 ‘명예 졸업생’으로 2년의 학위를 끝마쳤다.

그럼에도 그는 만료가 다가오는 학생비자와 학자금대출 상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려야했다. “졸업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보다도 졸업 후에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이 더 컸어요.” 취업에 대한 우려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최 씨가 쌓아왔던, ‘한국인만의 성실한 이미지’ 덕분이었다. “대학교 교수들 사이에서 한국학생들의 평판이 좋게 소문이 나니까, 업계 1위였던 ‘굿 라이프’ 피트니스에서 한국학생을 선발할 기회를 달라고 먼저 이메일이 왔어요.” 주저 없이 면접을 잡은 최 씨는 일사천리로 굿 라이프와 계약을 맺은 뒤 취업 비자로의 전환을 성공할 수 있었다. 절실한 기회를 잡은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을 따라올 수 있는 동료는 주위에 없었다. “캐나다에서는 인종차별이 불법이에요. 내가 아시안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다는 느낌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요. 물론 내가 자국민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아요. 하지만 한자리에서 꾸준히 열심히 하면 그 사람의 능력을 알아본다는 건 한국이나 캐나다나 똑같더라고요.”

5년간 퍼스널트레이너로 성실하게 살아온 최 씨는 작년에 영주권 취득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비자가 해결됐다고 해서 고민이 해결된 건 아니다. “집안에서 장녀여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 걱정되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나 혼자만 생각하면, 토론토같이 살기 좋은 도시는 없어요.” 사람 사는 곳인 만큼 캐나다에도 질투와 뒷말이 존재한다. “그래도 토론토에서는 ‘왜 결혼하지 않냐’는 쓸 데 없는 참견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직장 상사의 눈치 보지 않고 여행을 떠날 수도 있어요.”

그는 캐나다 취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준비물은 맨 땅에 헤딩하는 것도 즐길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장밋빛 꿈만 가지고 건너오기엔, 관공서 우편물 하나 읽는 것도 과제가 되는 게 해외취업이에요. 자잘한 어려움에 봉착할 때 마다 이겨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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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인 최선정 씨

삼육대 일본어과에 재학 중인 최선정(여·24) 씨는 6개월 전, 일본으로 취업하기 전에 경험을 쌓고자 일본 오사카로 떠났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은 최 씨는 카페와 호텔레스토랑을 거쳐 현재는 베이커리 카페와 공항면세점에서 근무 중이다.

“오사카와 도쿄, 두 차례의 여행 덕분에 일본사람과 이야기할 때 스스로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버렸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에 푹 빠진 그는 대학도 일본어과로 진학했다. 친구들과 다녀온 오키나와 여행을 시작으로 해서 1년 후 도쿄를 여행하기까지, ‘같은 나라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란 감탄과 함께 일본을 더 알아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저한테는 유학 비자보단 사람도 만나고 여행도 할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적격이더라고요. 무엇보다 부모님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게 결심을 굳히는데 큰 도움이 됐죠.”

최 씨는 소중한 1년을 하루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빠른 적응을 위해 한국에서 일본어 능력시험(JLPT) N2급을 미리 땄다. “물론 언어능력이 제로인 상태에서 가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일본에 가서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2급 정도의 실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비자발급은 혼자 힘으로 버거워 유학원을 찾았다. 서류는 전부 스스로 작성하고 번역이 필요한 사유서만 번역 업체의 도움을 살짝 받았다.

패밀리 레스토랑, 영화관, 옷 가게 등 한국에서도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했지만, 일본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는 아무리 비슷한 아르바이트라도 전혀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국과 일본의 비슷한 점은 눈치 빠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던지 적응하기 쉽다는 것, 딱 하나 뿐이었어요.” 구직사이트를 통해 면접 약속을 잡고 찾아간 첫 번째 카페에서 그는 단번에 붙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이나, 카페 알바 경험이 없어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던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질문하고, 사람자체를 보고 채용하더라고요.” 아주 작은 카페라도 직원을 위한 매뉴얼 책이 있었고 교육은 굉장히 상세했다. 대다수가 최저 시급 834엔(약 8500원) 이상과 교통비를 전액 지급했다. “지금 일하는 베이커리 카페는 시급이 900엔(약 9100원) 이상으로 일본에서도 드문 조건이에요.”

다만 채용이 확정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지연돼 애를 먹기도 했다. 그는 카페에 지원을 하고 연락을 받아 면접을 잡고, 그 후에 채용연락 날까지 기다리는데 2주 이상을 기다려야했다. “이번에 채용된 공항 면세점도 면접부터 연락을 받기 까지 한 달이 걸려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는 비자가 만료되면 졸업을 위해 한국으로 귀국한다. 귀국해선 일본의 기업에 대해 조사 후 관심 가는 기업으로 취업에 도전할 예정이다. 그는 워킹홀리데이를 계획하는 학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1년이라는 시간은 짧아서 금방 지나가더라고요. 그러니 워홀을 떠나기 전에 한 달에 3번 여행가기, 언어자격증 1급 따기처럼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가길 추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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