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김예진 전문기자

 “인생에 있어 가장 위대한 일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이다” 영화 ‘물랑루즈’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명대사다. 사람들은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간다. 사랑을 하는 이유도 ‘그저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과 하나 되고 싶어서’,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줘서’ 등 제각각이다. 학자들이 사랑을 정의하고 연구할 때 결론 또한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다. 철학과 신학에서는 여전히 사랑에 대해서 연구 중이고, 심리학과 생리학에서는 계속 새로운 발견이 이뤄진다. 각 학문에서는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사랑은 왜 시작하게 될까

 진화론과 생리학에서는 사랑을 종족보존에 수반되는 작용으로 본다. 정신과 전문의인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최명기 연구소장은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는 아이를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을 사랑한다는 감정을 통해 실현한다고 본다”며 “사랑을 시작하는 이유는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원시시대의 경우 빙하기에 동굴을 옮겨 다니며 생활해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큰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인간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일을 진행하지 않는 동물이기 때문에 위험을 사랑으로 상쇄시켜 자식 번성을 합리화했다. 사랑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야 발현한다. 최 소장은 “상대방의 성적인 매력을 느껴 성관계를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사랑”이라며 “물론 성관계만 원하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일회성 관계에 불과하고, 정서적인 안정감과 즐거움, 성적인 관계가 더해질 때 사랑이 완전해진다”고 말했다.

 최명기 소장은 “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사랑을 시작하게 됐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고 말했다. 과거 모든 이들이 종교를 갖고, 불행에 빠지면 일제히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다 종교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바뀌면서 그 자리를 인간을 향한 사랑이 차지한 것이다. 최 소장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심적으로 끌려서 사랑한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욕망과 구원을 위한 행위”라고 설명했다.

 

학문별로 다양한 사랑의 정의

 철학에서 바라보는 사랑은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열정이다. 김석(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교수는 “인간은 혼자지만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품을 수 있고 이에 설레는 것”이라며 “남녀 간의 사랑 말고도 친구 간의 우정, 이웃에 대한 사랑 등 모두 사랑이란 감정이 있기 때문에 이뤄진다”고 말했다. 사람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사랑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이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집필한 ‘향연’에 등장하는 에로스(Eros)에서 출발한다. 에로스란 다른 이와 하나가 돼 함께하고자 하는 일종의 ‘열정’이다. 김석 교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결여를 채우기 위해 사랑, 즉 에로스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학에선 이와 같은 철학적 관점의 사랑을 모두 포함하면서도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베푸는 사랑’을 강조한다. 이규성(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는 “철학의 에로스 외에도 개방적, 지성적인 필로스(Philos), 베풀어주는 아가페(Agape)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사랑”이라며 “베푸는 사랑 중에서도 자기희생적, 헌신적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설명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간의 사랑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여기지만 본질적으로 일치화를 지향할 필요도 있다. 이규성 교수는 “질적으로는 수직적 사랑인 하느님의 사랑과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사랑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최대한 하느님의 사랑과의 일치화를 통해 상대에 대한 사랑이 ‘베풂의 사랑’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남성과 여성이 대하는 사랑

 김석 교수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사랑을 분석한 결과 섹슈얼리티 개념에서 남성적 방식과 여성적 방식이 따로 존재한다고 밝혔다. 김석 교수는 “젠더적 차원에서 남성적 방식은 나르시시즘적 사랑을 보이고, 여성적 방식은 그 반대인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나르시시즘적 사랑은 항상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한다. 상대를 대상화할 수도 있고, 물질을 갈구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상대에게 나아가기 위한 갈구다.

 심리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서로 갈구하는 바가 다르다. 최명기 연구소장은 “남성은 성적인 매력을 중시해 여성의 신체적인 매력을 가장 먼저 보고 그 이후에 경제적인 부분 등 다른 면을 본다”고 말했다. 그에 반해 여성은 사랑에서 성적인 매력이 차지하는 부분이 낮다. 그 대신 상대를 선택함에 있어 책임감과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이는 고전적 관점으로 최근엔 이와 같은 이분법이 변화하고 있는 추세다. 최명기 연구소장은 “현시대로 오면서 남성 또한 지성과 성격을 보는 부분이 늘어나고, 여성 또한 성적인 매력을 보는 사람이 증가했다”며 “최근 남성과 여성의 사랑 경향이 비슷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사랑이 남성상과 여성상으로 분류된 것은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다. 본교 정창권(문화대 문화창의학부) 초빙교수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정착되는 18세기 전까지는 남성상과 여성상이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며 “우리가 알고 있는 남성의 가장으로서 역할과 여성의 현모양처 역할은 조선 후기에서나 생긴 것”이라 설명했다. 16세기 이전까지는 현대 사회와 달리 여성이 사랑에 적극적이었다. 정창권 교수는 “당시에는 남성이 처가살이를 하던 시절이라 여자가 남자를 선택해 결혼했다”며 “삼국유사나 조선 전·중기의 야담에서 여자들이 먼저 프러포즈하고 사랑표현도 노골적으로 하는 등 조선 후기와 많이 달랐다”고 설명했다.

 

사랑이 왜 변하니?

 신학에서 헤어짐과 이혼, 사랑의 변질은 극복돼야 하는 문제로 여겨진다. 이규성 교수는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닌 부모를 포함해 여러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임을 인지해야 한다”며 “그렇게 사랑을 함에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기에 자기애착적인 면을 보여 죄를 짓고 비도덕적인 활동을 한다”고 설명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될 경우 이는 타인의 복수심을 유발해 악순환의 고리를 발생시킨다. 이규성 교수는 “잘못을 했을 경우 자기반성을 통해 악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며 “반성하고 뉘우칠 경우 다시 올바른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만약 여기서 해결하지 못하고 사랑이 갈등과 폭력으로 왜곡된다면 새로운 대처가 필요하다. 이규성 교수는 “집착하는 사랑이 심해져 상대를 소유하고 조정하고자 한다면 이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며 “이때는 관계가 깨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랑은 여러 요소로 이뤄졌지만, 열정으로만 생각하는 경우 변질이 발생하기도 한다. 김석 교수는 “연구에 의하면 감정의 끌림에 의한 사랑은 900일 정도만 유지 된다”며 “사랑의 유효기간이 별로 길지 않다”고 설명했다. 사랑은 이 외에도 친밀감과 헌신감 등이 모여서 이뤄진다. 김석 교수는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에 따르면 사랑, 친밀감, 헌신감이 균형 있게 이뤄지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계가 뒤틀릴 수 있다”며 “이때는 집착과 폭력이 나오는 등 안 좋은 방향으로 사랑이 바뀐다”고 말했다.

 조선 시대에도 이혼은 빈번하게 이뤄졌다. 정창권 교수는 “양반들의 경우 신의를 굉장히 중요시해 이혼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평민과 노비들에게 이혼은 일상적인 행위였다”며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사랑을 ‘둘이 좋아서 같이 살면 결혼, 싫어서 찢어지면 이혼’이라 불렀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법적 제재가 없어 비교적 이혼이 자유로웠다. 16세기 이전에는 양반들의 이혼 건의도 잦았을 정도다. 정창권 교수는 “일부 고지식한 양반층을 제외하고는 여성들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성들과 살지 않겠다고 상소를 많이 했다”며 “여성들도 재산과 권력이 있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쉽게 별거를 해 남성들이 사과하는 편지나 글이 많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상적인 사랑이란

 정창권 교수는 이상적인 사랑을 서로를 존중하고 소통을 중시하는 관계라 설명했다. 정 교수는 “인생은 너무 척박하고 길어 혼자 살기 힘들다”며 “나 혼자 인생을 살아가기 힘들어 이성이건 동성이건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고, 이때 동반자는 나와 동등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존중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현대사회에서 동반자를 동등 관계가 아닌 종속 관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정창권 교수는 “조선 시대에선 부부에게 집안과 사회의 중요도가 같거나, 오히려 집안이 더 중요했다”며 “집안의 권력이 셀 경우 사회적인 영향력도 강해 사회적으로 여성의 지위도 강했지만, 지금은 가정적으로 여성의 희생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여성의 사회적 인권이 커져야 과거와 같이 서로 존중하며 부부가 함께하려는 진정한 사랑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신학에선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놓는 헌신적인 사랑을 이상적이라고 본다. 이규성 교수는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최고의 사랑은 헌신적인 사랑”이라며 “모든 악의 고리를 사랑을 통해 끊어내는 것이 최종적으로 사랑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이유도 악을 선으로 갚은 자기 헌신적 죽음이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의 제자들은 사랑 앞에서 악이 무릎을 꿇는다고 확신했다. 그 이후 제자들의 죽음 또한 악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에 대한 적극적 죽음으로 평가된다.

 사랑은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이상적 사랑을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다. 김석 교수는 “서양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사랑은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둘이 둘로 남을 수 있는 무대를 사랑’이라고 정의한다”며 “한쪽이 한쪽을 위해 희생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고 공존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사랑이 자연 발생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랑의 성 본능은 자연적이지만, 성에 관한 담론과 구체화한 사랑, 결혼 등은 문화적 산물이다. 두 가지를 복합적으로 볼 때 사랑은 자기중심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김석 교수는 “사랑을 폭넓은 관계의 출발점으로 정의한 것도 이 때문”이라며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사랑을 끌림만이 아닌 인간적이고 문화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모든 학문에서 사랑에 대해 정의하고 생각하는 방법은 다르다. 하지만 사랑을 시작하려면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하고, 사랑하는 중에는 배려와 존중이 필요한 것은 다르지 않다. 이상적인 사랑을 겪고 있을 때 인간은 진정한 따스함을 경험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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