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훈
서울시립 청소녀건강센터 나는봄 여성의학과 의사

▲ 이미지 출처 | ZiarulRing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에 관한 청원이 30일 동안 23만명의 숫자를 넘기고 그로부터 한 달 후 정부의 답변이 발표되었다. 이 답변에서 정부는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며 ‘자연유산 유도약의 합법화 여부도 사회적·법적 논의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미진한 태도를 보였다.

‘미프진’은 수술 없이 임신중지를 하는 데 필수적인 약물로, 세계보건기구(WHO)의 필수 의약품 목록에 등재됐고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승인도 받았다. WHO의 ‘안전한 임신중지 : 보건 체계를 위한 기술 및 정책 가이드’ 역시 이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 방법을 지속적으로 권고해오고 있다. 한국 의학계에서는 WHO나 FDA의 권위를 인정하여 약물이나 질병에 대해 그 지침이나 권고를 진료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미프진에 대해서는 산부인과 의사들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의과대학에서는 임신중지가 불법인 현재 상황에서 관련내용을 가르치지 않으며 병원도 비교적 관리가 손쉬운 수술만을 해왔기 때문이다.

‘미프진’의 약물명은 미페프리스톤으로, 1988년 프랑스에서 개발된 이래 2017년 현재까지 62개의 국가에서 승인되었고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사용량이 빠르게 급증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임신중지의 90%이상에서 약물 방법을 사용한다고 보고되기도 한다(2012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90%), 포르투갈(65%), 스페인(63%), 스위스(62%), 프랑스(54%), 영국(북아일랜드 포함 53%), 네덜란드(20%), 벨기에(17%), 독일(15%)). 미국은 뒤늦게 이 대열에 참여하여 2000년 FDA의 승인을 받았고, 이후 전체 임신중지의 수는 감소하는 반면 약물 방법 사용은 증가하고 있다(2001년 6% -> 2014년 31%(임신 9주 이전에서는 45%)).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2013년 임신중단을 하는 시기가 이전보다 더 앞당겨지고 있다는 통계를 보고했는데(임신 8주 이내에 66%, 12주 이내에 89%), 이는 약물 사용의 증가와 무관하지 않다.

미페프리스톤은 임신 유지에 필요한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의 생성을 억제하며, 이후 자궁 수축에 관여하는 미소프로스톨을 복용함으로써 임신중지를 돕는다. 이렇게 두 약물을 혼합하여 사용하면 93~98%의 효과가 있다. 또 다른 방법은 미소프로스톨(대표적인 상품명은 ‘싸이토텍’)을 단독으로 복용하는 것인데 이는 혼합 복용보다는 다소 떨어지지만 역시 90%이상의 효과를 가지며, WHO는 미페프리스톤 도입이 안 된 지역에서 이것을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미소프로스톨은 위궤양 치료제이지만 가격이 싸고 보관이 쉬우며 빠른 약물 효과 때문에 분만후 출혈 등 목적으로 산부인과에서 흔히 사용하는 약이다.

두 약물을 복용하면 몇 시간에서 수일에 걸쳐 자연유산과 비슷한 증상을 겪게 되는데, 하복부 통증, 출혈, 어지러움, 피로, 구역, 구토 등이 생길 수 있으며 배출물이 나오고 나면 대부분의 증상은 호전된다. 출산으로 인한 사망률과 비교하였을 때 임신중지로 인한 사망률은 1/10 정도로 낮고, 임신 초기에 약물을 복용하면 위험성은 매우 적다.

약물 도입은 스스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비밀이 유지될 수 있고 의료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도 가능하다. 수술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 대신 자연유산과 비슷한 경험을 거친다. 약물이 실패하면 수술을 할 수 있는데, 수술의 한 방법인 ‘진공흡입술’은 이전의 ‘소파술’에 비해 위험성이 적으며, 전신마취가 필요 없고 단시간에(5~10분) 끝나고 이후 출혈도 적고 더 확실하다는 장점이 있다. WHO의 지침은 임신 12~14주까지 약물과 진공흡입술을 상황에 따라 선택하고, 임신 9주까지는 집에서 약물을 자가 복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병원에서나 집에서나 그 안전성이나 효과 면에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물 도입은 수술 이외에 하나의 선택지를 더 늘리는 것이며, 이용 가능한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약물 도입이 허용된 지역에서도 약물의 사용률과 만족도는 매우 다르다. 문제는 ‘언제, 어디에서,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에’ 제공할 것인가이다. 태아의 주수에 따른 규제, 사전 상담 유무, 약물의 보험 적용 여부 등 세부적인 법률 규정에 따라 약물이 도입되더라도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권리에는 상당한 차이가 생긴다.

1988년 프랑스에서 미페프리스톤이 ‘RU-486’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을 당시, 임신중지를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그 상용화가 위기에 처했었다. 그때 프랑스 보건부장관은 이 약물을 ‘여성을 위한 도덕적 상품’으로 명확하게 규정하면서 임신중지 논의가 반대세력이나 제약회사의 이익으로 흐르는 것을 막았다. 2017년 한국은 현재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단계’이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친절한’ 청와대의 답변을 받았다. 국가를 상대로 어떤 권리를 요구할 때 법률이나 제도 안에서 적당한 합의와 타협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어렵게 생겨난 지금의 논의가 법률적, 의료적, 행정적 편의에 따른 결과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임신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관계이다. 임신중지 논의가 편협한 권리 충돌이 아닌 모두가 함께 살만한 삶이 되는 세상을 상상하는 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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