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김혜윤 기자 cutie@

#. “강간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성관계를 강요했어요. 때리진 않았지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 공포를 느꼈어요.”

박 모(여·22) 씨의 전 남자친구는 그에게 꾸준히 성관계를 요구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일절 허락하지 않았다. 이별 통보 후에는 예고 없이 박 씨의 집 앞에서 장시간 기다리기도 했다. 물리적 폭력 행사가 없었기에 당시에는 문제를 인지하지 못했지만, 최근 미디어를 통해 이것이 ‘Romanticized Abusing(로맨스로 묘사된 학대)’, 즉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을 배우게 됐다. 데이트 폭력이란 연인 간 혹은 헤어진 연인 간에 발생하는 폭력 행위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피해자가 피해를 자각하지 못하거나 도리어 자신을 탓하는 데이트 폭력 피해 사례가 적지 않게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016년 한국여성의전화가 ‘데이트 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여성 응답자 1017명 중 61.6%가 데이트 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상당수가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언어적, 정서적, 경제적 폭력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답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해자는 대처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인 만큼 그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것으로 설명된다.

 

‘사랑싸움’으로 포장 된 ‘데이트 폭력’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을 흔히 연인 사이에 발생하는 물리적 폭행으로만 국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언어적, 심리적, 성적 폭력까지도 데이트 폭력의 범위에 포함된다. 박미랑(한남대 경찰학과) 교수에 의하면 언어적 폭력은 상대를 비하하거나 위축시키는 말로 자존감을 훼손시키는 것, 심리적 폭력은 집착과 통제 행위를 통해 상대의 사고와 행동반경을 지배하는 것, 성적 폭력은 상대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성관계를 갖게 하거나 원치 않는 행위, 체위 요구 또는 콘돔 사용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계에선 이러한 정서적 데이트 폭력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 당사자들이 폭력적 요소들을 연인 사이의 일반적인 행동규율로 착각해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데이트 폭력 피해자 박 모 씨는 “연애 당시에는 남자친구의 행동을 나를 사랑해서 그런 것으로 착각했다”며 “무섭고 불편해도 연애에서는 당연한 일이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정서적 데이트 폭력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낮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한국여성의전화 실태 보고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은 친밀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사적인 문제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박미랑 교수는 “아무리 폭력이라고 얘기해봤자 주변인들이 이를 사랑싸움으로 치부해버린다면 도움을 청할 수가 없다”며 “당사자의 인식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이를 폭력으로 인지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연인끼리 다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심리적, 물리적, 성적 권리를 침해하는 정도의 싸움부터는 엄연한 폭력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찰도 대처에 있어서 소극적이라는 지적이다. 박하연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형사는 “연인 사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처벌하는 특정 법률이 없어 경찰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현재 피해자를 지원하거나 보호할 수 있는 법체계가 없어 자칫 피해자가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 그래픽|이혜원 기자 rsvls@

 

사랑 아닌 소유욕

가장 흔한 정서적 데이트 폭력의 양상으론 상대의 행위를 규제하는 ‘통제’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주로 연인의 ‘애정’이나 ‘관심’으로 정당화되기 쉬워서다. 통제의 일종으로 활동 범위에 있어 제약을 받는 일도 있다. 헤어진 연인의 감시에 시달렸다는 김 모(남·30) 씨는 “전 여자친구가 GPS 추적 앱으로 일거수일투족과 동선을 감시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지나친 통제로 대인관계에 문제를 겪는 사례도 있다. 신 모(여·22) 씨는 “전 남자친구가 가족, 친구와의 만남을 싫어했고 연락이 안 되면 불안증세를 보이기도 했다”며 “강요나 통제는 심리적으로 상대를 위협해 불안감에 시달리게 하므로 폭력에 해당된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유형의 데이트 폭력은 상대를 동등한 위치의 사람이 아닌 하나의 소유물로 보는 소유욕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다. 한국여성의전화 손문숙 활동가는 “폭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소유물을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함”이라며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거나 따르지 않았을 때 폭력을 동원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피해자나 가해자가 폭력에 노출된 빈도가 높을수록 이에 둔감해져있는 경향이 있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이수정(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데이트 폭력 가해자들은 대부분 어릴 때 폭력적 환경에 자주 노출돼 폭력을 수용, 용인하는 수준이 높고, 자아 통제력도 낮은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박미랑 교수는 폭력에 둔감해진 피해자도 우려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폭력이 학습된 피해자는 이에 둔감해져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명 ‘매 맞는 아내 증후군’에 노출 될 수 있어 각별한 관심과 보호 조치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적절한 예방, 대처 중요해

전문가들은 정서적 폭력은 현행법으로 처벌하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세려법률사무소 박영주 변호사는 “정서적 폭력 같은 경우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개입이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며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무조건 가해자를 전과자로 만들기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통제 행동이 물리적 행동으로 옮겨질 경우 처벌 근거가 마련된다. 일례로 핸드폰을 몰래 보는 행위 같은 경우에는 정보통신법 위반 등을 적용할 수 있다. 이수정 교수는 “연인 간의 경우 반의사불벌죄 규정이 성립돼 피해자의 의지가 취약한 경우에는 가해자 처벌이 어렵다”며 “스토킹 방지법의 입법이 신속히 이뤄져 심적 학대나 감시, 통제 등의 행위를 처벌할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법적 보호 장치가 취약한 현재로서는 폭력을 예방하고 적절히 대처하는 사회 전반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교육기관에서 데이트 폭력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 데이트 폭력 예방법 중 하나로 제시된다. 박미랑 교수는 “중학교부터 연애와 데이트 폭력에 대한 교육이 마련된 미국처럼 우리나라도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며 “작은 폭력에 예민해져야 더 큰 폭력과 범죄에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데이트 폭력의 당사자들에게 심리상담도 권장된다. 오현주 KU마음건강연구소 임상심리전문가는 “커플상담이나 개인상담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대학 내 양성평등센터나 학생상담센터 등의 기관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추천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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