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젊은 사내의 생황 부는 모습을 영상으로 재현한 '월하취생' 미디어아트
▲ 2. 영상 속 '화성원행반차도' 군위대의 발걸음에서 위풍당당함이 느껴진다.
▲ 3. 화려한 스크린으로 재탄생한 '행령풍속도' 8첩 병풍, 김홍도만의 익살스러운 인물표정이 영상에서 더욱 생생하다.

조선의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가 현대 미디어아트를 만나 부활했다. 지난 9월 전쟁기념관에서 개최돼 내년 2월까지 진행되는 <김홍도 Alive : sight, insight> 전시회는 김홍도 작품을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한 복합 미디어 전시회다. 총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분돼 작품에 담긴 김홍도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작품세계와 삶을 생생히 느끼도록 구성됐다. 미디어아트로 살아 움직이는 김홍도 작품을 감상하며 18세기 후반 다양한 군상들과 조선의 생생한 일상을 느껴보자.

 

‘인간’ 김홍도를 만나다

  전시회 입구 'PROLOGUE'에 들어서자 4개로 나뉜 스크린이 눈길을 끈다. 화면 속엔 젊은 사내가 은은히 쏟아지는 달빛 아래 생황을 불고 있다. 한 동이의 술독을 보아 그는 달빛의 애잔함을 이기지 못하고 붓 대신 술잔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불그스름한 얼굴과 정강이를 드러낸 옷매무새엔 취기가 묻어나는 듯하다.

화면에 나타난 그림은 김홍도의 ‘월하취생(月下吹笙)’이다. 월하취생은 8세기 당나라 시인 나업(羅鄴)의 생황시(笙篁詩) 구절인 ‘월당처절승룡음’(月堂凄切勝龍吟, 달빛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생황 소리는 용의 울음보다 처절하게 울린다)을 표현한 작품이다. ‘월하취생’ 그림 화면 오른쪽엔 월당처절승룡음 구절이 고스란히 적혀 김홍도가 이 구절을 작품에 담아냈음을 드러낸다.

  "단원의 얼굴이 청수(淸秀)하고 정신이 깨끗해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해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린 앞에 걸린 김홍도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사인초상(士人肖像)’에선 단정한 그의 용모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화원에게 자화상은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사인초상 속 젊은 김홍도는 단순한 화원이 아니라 기개 넘치고 단정한 선비로 담겨있다. 중인의 신분임에도 그가 추구해온 선비 의식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전시회는 PROLOGUE를 통해 월하취생과 사인초상에 녹아든 김홍도의 기개 넘치고 단정한 선비와 같은 모습과 함께 그림, 악기, 술과 같은 풍류를 좋아하고 즐겼던 자유분방한 면모도 극적으로 표현했다.

  PROLOGUE를 지나면 첫 번째 섹션 ‘박달나무 언덕 : 올려보다’가 펼쳐진다. 섹션 입구부터 늘어선 하얀색 터널은 한 곳으로 소실점을 모은다. 그 끝엔 그림자의 움직임으로 박달나무 밑 그늘을 떠올리게 하는 추상적 영상 하나가 있다. 이는 김홍도가 스승인 강세황과 예술적 기반을 쌓았던 ‘단원’이라는 공간에 대한 그의 한결같은 동경을 표현한 것이다. 단원은 경기도 안산의 한 곳으로 추정된다. 영상에서 노을 진 서해 언덕의 박달나무가 바람에 흔들림으로써 ‘단원’만의 청량하고도 서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전통 현악기를 현대적으로 편곡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와 스승 강세황 등과 흥취를 나눴던 당시를 보다 선명하게 상상하도록 만든다. 이은정(여·32) 씨도 깊은 감상에 빠졌다. “저는 드라마에서 김홍도의 모습을 많이 봤었는데,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처럼 김홍도가 살았던 바깥 풍경을 생생히 구현해 흥미로웠습니다.”

 

왕의 철학을 담다

  두 번째 섹션 ‘궁궐 : 살펴보다’에선 김홍도가 정조의 정치 철학을 그림에 녹여낸 작품들이 미디어아트로 재탄생됐다. 정조는 도화서의 화원 중 뛰어난 자를 선발해 규장각으로 파견하는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제도를 시행했고 김홍도도 그중 하나였다. 자비대령화원은 정조의 통치 철학을 시각화하고 기록했는데, 두 번째 섹션의 시작을 장식한 김홍도의 ‘규장각도(奎章閣圖)’가 대표적 예시다. 흑백의 휑한 터에 규장각이 차츰 올라서면서 마지막엔 형형색색의 단청이 입혀진다. 이 같은 연속적인 영상에서 당대 학술 진흥과 친위 관료 양성을 위한 개혁기구로서의 규장각을 통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어 ‘화성원행반차도(華城園幸 班次圖)’를 세 개의 영상에 나눠 행차의 생동성을 불어넣은 작품도 발길을 사로잡는다. 화성원행반차도는 정조가 어머니인 헌경왕후와 사도세자의 회갑 잔치를 위해 사도세자의 능이 있던 화성의 현륭원에 행차한 것을 기록한 행렬도다. 인물들을 해학적으로 묘사하는 김홍도만의 화풍이 재미를 선사하면서도 왕가 행차의 위풍당당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첫 번째 영상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앞세운 정조의 가마 부대가 위용을 뽐내며 걸어간다. 정조의 가마는 상징적으로 배치됐을 뿐 실제 정조는 이 가마에 타지 않는다. 이후 삼엄한 경호를 받는 헌경왕후의 가마, 그 가마 뒤를 따르는 정조와 장용위의 행렬이 이어진다. 당시 행렬은 약 6000명이 동원됐는데, 이 중 절반인 3000명이 왕실 직속 호위 부대인 장용위라는 점에서 정조의 왕권 강화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 중 제7폭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의 제작 과정을 김홍도와 정조의 미디어 채팅 대화로 익살스럽게 표현한 작품에선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돋보인다. 당시 김홍도는 7박 8일 화성원행을 기록하는 화원의 총책임자로 활동했고 항상 행차 대열보다 앞서가 높은 지대에서 행차를 조망하고 기록했다. 정조는 백성들이 길에 엎드리게 하지 않고 행차를 자연스럽게 구경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환어행렬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이다. 허구의 채팅 대화지만, 김홍도의 그림을 보며 백성들이 즐기는 모습에 흐뭇해하는 정조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연인과 함께 전시회를 찾은 장재형(문과대 사회13) 씨도 가상의 대화에 미소를 피식 지었다. “정조와 김홍도의 대화를 저희가 흔히 사용하는 채팅 형식으로 가져와 재밌었어요. 익살스러운 대화에 웃음도 났지만, 환어행렬도가 품은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념에서 벗어나 금강산을 조망하다

  세 번째 섹션 ‘금강산 : 내려다보다’에선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김홍도의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을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 김홍도가 활동한 시기에 현실과 괴리된 채 관념에만 사로잡힌 성리학에 대한 회의로 실학이 대두됐고 미술계 역시 이상을 중시하는 문인화에서 벗어나 실제 경치를 담는 풍조가 생겼다. 김홍도는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및 관동 8경 지역을 여행하며 100여 점의 초본이 담긴 화첩본(畵帖本)을 바쳤는데, 이것이 금강사군첩이었다.

  여러 그림으로 나뉜 금강사군첩이 영상에서 하나가 되자 그림만으로는 담기 힘든 압도적인 절경을 자랑했다. 깊은 산기슭에서 나타난 맹금류는 금강산 봉우리를 날아다니고 금강산 정자 아래 모인 선비들은 시조를 읊는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그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상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현대 사진가들이 렌즈로 포착한 실제 전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금강사군첩은 이 같은 사실성으로 한국적인 산수화풍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고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발전을 이루는 데 발판이 됐다. 왕연가(王延佳, 여·26) 씨는 웅장한 금강산 모습에 연신 감탄을 표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 같은 전통화를 잘 모르잖아요. 미디어아트로 보기 편하게 풀어내니 훨씬 관심이 가네요.”

 

김홍도의 마음을 열어보다

  그 유명한 김홍도의 풍속화를 재구성한 미디어아트는 네 번째 섹션 ‘저잣거리 : 꿰어다보다’에 마련됐다. 김홍도는 사대부적 관념이 들어간 풍속화에서 탈피하고 현실적인 장면을 담고자 했는데,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8첩 병풍은 그런 그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치밀한 선묘로 다양한 모습의 인물들을 정확히 표현하고 배경의 기와집, 개울가에 놓인 돌담, 문짝에 써 붙인 춘첩자(春帖子) 내용까지 자세히 묘사했다. 특히 8폭 중 5폭이 한양 도시인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어 당시의 한양의 일상이 어땠는지 짐작 가능케 한다.

  전시회에선 이런 8개의 병풍 장면이 영상으로 재구성됐다. 수직으로 놓인 스크린의 병풍은 화려한 색감과 입체적인 인물로 채워져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일할 때도 취해있는 지방 관리, 상을 치고 있는 와중에 기녀와 술 마시며 노닥거리는 양반의 모습은 당시 부패한 지배층을 풍자한다. 버드나무가 한창 물이 오른 개천 다리에서 사당패가 한바탕 흥겨운 공연을 펼치는 장면에선 김홍도가 바라본 조선의 모습이 꾸밈없이 그려진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선비가 영상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김홍도가 자기 자신을 여행하는 나그네로 표현해 본인의 그림 속에 넣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그리는 기법은 조선 후기 풍속화 등의 실경산수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으로 영상에서 숨은 작가를 찾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마지막 다섯 번째 섹션은 ‘단원의 방 : 응시하다’로 김홍도의 내면이 드러나는 ‘추성부도(秋聲賦圖)’의 장면이 영상으로 재구성됐다. 제작년도가 알려진 김홍도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나중에 그려진 추성부도는 김홍도가 죽음을 앞두고 완성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추성부도는 중국 송나라 시대 시인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추성부(秋聲賦)’를 그림으로 나타낸 시의도(詩意圖)다. 영상은 추성부도 중에서도 한 장면에 집중했는데, 밖에 이상한 소리가 나는 이유를 알아보러 나간 동자가 구양수에게 “별과 달이 환히 빛날 뿐 사방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들립니다”라고 답했다는 장면을 확대한 것이다. 동자의 대답을 들은 구양수는 이상한 소리가 가을의 소리임을 깨닫고 가을의 자연현상과 인간사를 연관 지어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했는데, 김홍도도 외로운 말년에 인생의 허망함을 이 화폭에 투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매서운 가을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를 갈필로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표현해 가을날에 고독한 김홍도의 말년을 더욱 처연하게 만든다.

  200년 전 천재 화가였던 김홍도는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시선은 작품에서 영원히 남아있다. 미디어아트로 그의 시선을 생생히 살린 <김홍도 Alive : sight, insight>에서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위대한 화가가 바라본 조선의 모습을 몸소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글│김인철 기자 charlie@

사진│조은비 기자 juli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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