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60∼70대의 연령층은 이 단어를 대하면 1950년대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당시 학생들의 책상 앞에 예외없이 커다란 글씨로 ‘Boys be ambitious!’ 또는 ‘Time and tide wait for no man’이라는 문자를 유행처럼 써 놓고 있었다. 별다른 깊은 의미도 모르면서 그랬지만 실제로 당시의 젊은 청소년들은 미래에 대한 뭔가의 상당한 포부와 야망을 품고 살았던 것이다. 간혹 어른들이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대통령’이라고 답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때와는 달리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그와 같은 거창한 미래의 꿈 보다는 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작은 대답이 많다. 이것은 현대 기계문명의 생활환경과 서구적인 합리주의, 실용적인 가치관과 함께 이지적인 지성만을 강조하는 학교 교육이 젊은이들이 갖고있는 감성적인 야성(野性)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것을 사회심리학자 마르쿠제는 그의 유명한 저서 『Eros and Civilization』에서 ‘인간본능의 문명화’라는 말로 잘 설명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일본의 학자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특징을 ‘양쪽 팔을 벌려 손끝이 닿는 범위만의 관심 영역’이라고 비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주역들은 이러한 개개인의 집합체보다는 한두 사람의 용기 있는 현실타파자나 모험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창조의 주역으로 등장하려면 어떻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가. 여기에 바로 고대정신의 한 축이기도 한 야성(野性)을 젊은 시기에서부터 집중적으로 기르는 것이다.

황당하고 미친소리처럼 들릴지 모르나 잘 듣고 실천하는 용기 있는 학생에게는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이다. 우선 답답하고 번잡한 서울로부터 탈출하여 아프리카로 떠날 일이다. 당장 돈이 없다면 방학동안에 남학생의 경우는 일당이 많은 공사판에 돌아가 벽돌지기 알바를 하고 여학생이라면 파출부의 알바가 매우 효율적이다. 경비의 절반쯤 모였을 때 부모에게 부탁하면 자녀의 태도가 기특하여 틀림없이 보태줄 것이다. 아프리카의 대초원과 원시세계 그리고 야생의 동물들…. 전혀 새로운 시원(始原)과 스케일 앞에서 자신의 과거는 점점 사라지는 탈아(脫我)의 경지에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충격과 희열을 느낄 수 있다. 탄자니아의 세렌게티 국립공원, 케냐의 마사이마라 대초원과 킬리만자로의 위용…늠름한 사자 떼(이것을 영어로는 Pride라고 함)와 코끼리 떼의 거대함, 지축을 흔드는 코뿔소, 날렵한 표범의 질주, 하이에나의 교활함, 아파트 3층 높이만한 야생 기린, 산등성이 전체를 시커멓게 덮고 다가오는 누우 떼…그 위엄과 열기는 우리들에게 원초적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대번에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킬리만자로에서의 밤 하늘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늘에 가깝게 한다. 별이 주먹만큼 커지고 몸은 은하수에 빠지는 경지에 이른다. 적어도 이러한 체험을 한다면 그동안 자신의 잡다한 일상의 일들이 매우 사소해지고 매사에 대범해지면서 누구나 포용되는 삶의 모습으로 바뀌어지며 모든 일에 용기와 기백이 충만된다.

인간은 삶의 노정에서 이러한 실존적 충격이 없으면 진보는 없다. 젊음으로 세계에 도전하되 청바지 입고 빠리의 몽마르트 거리를 기웃거리는 배낭여행 하지말고 아프리카 대초원을 가로지르는 도전과 용기로 기백을 키워야 한다. Boys be ambitious! 고대인이여!

김동규(인문대 교수, 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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