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나이 칠십인데 무엇이 많다는가
   둘 스물 , 하나 열에, 이십 청춘,   그 뿐이라."
 
언젠가, 어느 차 마시는 자리에서  시조시인 최 승범 교수가 이 비슷하게 읊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다들 파안(破顔) 대소(大笑)! 아니 노안(老顔) 대소했던 기억을 앞세워서 이 글을 쓴다.
 '老'는 물론 '늙을 노'라고 읽는다. 하지만 이 글자의 뜻은 단순하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꽤나 다양하고 복잡한 뜻을 간직하고 있다.         

  '老'는 흰 수염 길게 나부끼는 모습을 본 따서 만들어진 글자다. 머리에 백발을 이고 턱밑에 흰 수염을 드리운 모습, 그게 老라는 글자라서 나이 많음은 백학(白鶴)에 견주어졌다.    학수(鶴壽)라면 장수한다는 뜻이다.

 한편 백(白)은 청정이요 맑음이요 평온(平穩)이요 안정이다. 또한 소슬한 지혜다. 노(老)는 이같이 삽상(颯爽)하다.

 그러면서 老의 백(白)은 서릿발이다. 굳은 절조(節操)와 곧은 기개의 표상이다. 정상에 하이얗게 눈을 쓴 태산과 머리에 백발을 인 노인은 서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이다.      
 
그러나 老가 언제나 아름다운 뜻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老의 아래에 붙은 '匕'는 '죽을 死'와 같다. 노쇠, 노망, 노추(老醜)란 말들은 듣기에도 민망한 말들이다.

 하지만, 노건(老健)을 비롯해서, 노숙(老熟), 장로(長老), 기로(耆老), 원로(元老) 등등 모두 하나같이 기라성(綺羅星) 같고 수로(垂露)같은 말들이다.

 '垂露'는 물론 '이슬 듣는다(떨어진다)'라고 읽혀질 수도 있는 말이다. 한데 그 수로(垂露)와 수로(垂老)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신 새벽, 풀잎에 이슬이 뚝뚝 떨지는 정경이 수로(垂老)인가 하면, 꽃잎에 함초롬히 내려앉는 이슬 또한 수로(垂老)다.  먼 빛으로 보는 이슬이  영롱한, 휜 구슬방울 같은 데서 유래한 말이라 생각된다. 한편 수로(垂老)는 가령, 老杜라고 일컬어진,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처절한 시 작품, '수로별'(垂老別)의 수로가 그렇듯이 바야흐로 늙음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그러니 수로(垂老)는 참 절묘한 말이다. 한편으로는 오월 찬란한 아침 이슬 내림인 수로(垂露)와 같은 뜻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늙음에 다다름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에 이슬을 인 사람, 그래서 노인은 신선이다. 흰 마리 함부로 검게 염색할 일이 아니다. 그건 오염(汚染)이고 추태(醜態)다. 나이 들어서 까맣게 머리 물들이면 그거야말로 노추(老醜)다.

 선풍(仙風) 도골(道骨) . 신선의 모와 도인(道人)의 체격. 

 그것은 동양인들이 스스로 다다르고자 한 인품과 인격의 완숙을 상징한다. 그래서 머리 허이연 신선의 모습은 동양인들에게는 가장 완벽한 '파더 이미지', 곧 '아버지 상(像)'을 의미했다. 지혜와 후덕(厚德)과 관대함을 의미했다. 인품과 도량이 더불어서 따뜻하고 밝고 맑음의  절정에 오른 사람을 신선이라고 우리는 일컬어 왔다. 혹은 도인이라고 불러 왔다. 우리들 한국인은 고운 최치원을 생각할 적마다 그를 신선과 도인의 표상으로 삼은 것이다. 옛사람들이 한 덕망 높은 선비의 초상(肖像)을 남길 때, 굳이 그를 백발 도인의 모습으로 그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격과 풍모가 더불어서 완숙한 모습을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래서 老는 노건(老健)이고 노숙(老熟)이었던 것이다. 노건은 서화(書畵)의 필체           며 격조가 완숙하면서도 건장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 누구나 차탄(嗟歎)과 묵상(默想)으로 대하기 마련인 추사의 '세한도'는 노건의 본보기다.

 노송(老松)은 그래서 둘 도 없는 인간의 노(老)의 반려요 도반(道伴)으로 섬겨진 것이다. 가난해서 더욱 곧고  외로워서 더욱 맑고 물러앉아서 더욱 고고(孤高)한 경지 그게 '퇴로(退老)'의 이상이다. 그래서 퇴로는 노송이 된다. 그것도 벼랑 위의 낙락장송이 된다.

 한데 오늘날 老는 많은 것을 빼앗기고 뜯기고 해서 그 풍모가 말이 아니다. 老가 다른 어떤 것보다  역사적인 큰 변화를 입은 것이다. 그나마 기울고 이우는 쪽으로 변화한 것이다.

 정치적 사건도 못 된 짓을 꽤 많이 했다. 5,16 쿠데타가 그랬고 소위 'IMF' 사태가 또한 후례 자식 노릇을 했다. 세대교체니 인력정비니 하는, 겉치레 그럴싸한 구실로 50대 이상을 퇴물(退物)로 전락시켰다.  거기다 핵가족 제도도 쌍놈 짓을 제법 했다. 그것들은 도당을 짜고는  끔찍하게도 노(老)의 나이를 50대로 내려 앉혔다.

 청년기는 그 발랄한 활력으로 , 장년기는 그 극기와 절제의 함으로  그리고 노년기는 노숙(老熟)의 지혜로 각기 제 개성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청년기와  장년기는 노숙을 위한 예비단계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老)를 퇴물로 삼으면서 사회와 문화의 노숙(老熟)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리하여 미숙(未熟)이 사뭇 나부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날로 미숙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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