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던 1905년, 교육구국을 표방한 보성전문학교는 쓰지 않던 종로의 작은 건물을 빌려 처음 문을 열었다.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그 끝은 창대하다고 했던가. 보성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힘을 키워 민족의 독립에 앞장섰고, 오늘날 고려대로 이어지며 수십만 명의 인재를 배출해냈다. 미약하지만 위대한 시작에 앞장선 3명의 인물을 소개한다.

대학원 건물의 충숙공 이용익 흉상

  ‘교육만이 살길’ 최초의 사립전문학교 탄생

  1854년에 태어난 충숙공 이용익은 젊은 시절 부보상으로 일하며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이후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과 친분을 쌓았는데 이용익은 걷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이유로 명성황후의 연락책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단천의 숨겨진 금광을 발견해 황실의 재정에 기여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됐다. 이로써 이용익은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내장원경에 이어 국가재정 최고 책임자인 탁지부대신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다툼 속에, 이용익은 러일전쟁이 한반도를 집어삼킬 것을 우려해 대한제국 중립선언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본 수뇌부는 이용익 제거가 시급하다고 판단해 일본으로 납치했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리해지자 국제 여론을 고려해 이용익을 귀국시켰다.

  이후 이용익은 ‘교육구국(敎育救國)’을 다짐하며 소학교부터 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했다. 일본에서 돌아올 때 사비로 수많은 책을 구매하는 등 준비를 마친 이용익은 고종에게 학교 설립 계획을 알렸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최초의 사립고등교육기관 보성학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은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라며 “원래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고 전했다.

  1905년 4월 3일, 보성전문학교(보전)는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 건물을 빌려 개교했다. 당시 정부 조직과 상통하도록 법률, 이재, 농학, 상학, 공학과로 구성된 2년제 전문학교였다. 보전은 형식상 사립학교였음에도 황실의 막대한 지원금으로 운영돼 황립 학교에 가까웠다. 명순구원장은 “이용익은 고종의 배려에 대한 감사와 보전의 특별한 위상을 표현하고자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을 학교의 상징으로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보전은 민족의 암흑기에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졌지만 수차례 위기를 겪었다. 일제가 사립학교를 탄압하는 동시에 황실의 재산을 대폭 축소하면서, 황실지원금으로 유지되던 보전이 경영난에 빠진 것이다. 게다가 귀국 후에도 일본의 탄압과 국내 정적들의 견제를 받던 이용익은 결국러시아로 망명한 뒤 1907년 서거했다. 이용익에 이어 학교 운영을 전담한 손자 이종호도 신민회 활동이 검거돼 체포되면서 보전의 운영비 조달은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문과대학 서관에 위치한 의암 손병희 흉상

  300만 천도교인이 힘 합쳐 구원한 보성

  의암 손병희는 정의로운 암자라는 뜻을 지닌 그의 호가 보여주듯 유년 시절부터 의기가 남달랐다. 이를 눈여겨본 인척 손천민이 손병희를 동학(이후 천도교)에 입도시킨 것을 계기로 손병희는 동학의 핵심 인물이자 민족 지도자로 거듭났다. 동학농민혁명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던 손병희는 근대화된 일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 인물과 교류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성주현(숭실대 HK+사업단)교수는 “손병희는 일본에서 교육이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임을 알게 됐다”며 “재정난을 겪고 있던 국내 학교들을 많이 지원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손병희는 귀국한 직후인 1906년 3월, 보전에 80원을기증하기도 했다.

  1910년 7월부터 보전 교장 대리직을 맡은 천도교인 윤익선은 재정난에 허덕이던 학교를 다시 일으키고자 천도교주 손병희에게 보성학원의 인수를 부탁했다. 결국, 1910년12월 손병희가 보전을 인수하면서 경영난이 조금씩 해소되기 시작했다. 특히 천도교의 헌납 제도인 성미(誠米)는 보성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성미는 천도교인들이 밥을 지을 때 식구 수대로 쌀을 한 숟가락씩 덜어내 한 달 동안 모은 뒤 천도교 중앙총부에 납부하는 방식이다. 성주현 교수는 “천도교인들은 주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농민들이었음에도, 300만 명 교인들의 성미를 통해 사립학교를 지원할 수 있었다”며 “말 그대로 십시일반”이라고 설명했다. 이로써 한시름 놓은 보전은 민족교육의 내실을 위해 새로운 교수진을 확보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제는 1910년 경술국치를 기점으로 천도교와 보전을 더욱 강하게 억압했다. 조선 최초의 사립전문학교였던 보전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에 위기를 느낀 탓이다. 일본 헌병대가 위협을 가해 성미제가 3년간 중단되기도 했으며 손병희를 폄훼하는 선전이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또 식민 지배를 받는 조선인은 실업 공부만으로도 족하다며 교명을 ‘사립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시켰다. 일제의 탄압은 1919년 3.1운동까지도 계속됐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손병희와 보전 교장 최린이 투옥되면서 보전은 또다시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본관 앞에 위치한 인촌 김성수 동상

  안암동서 첫 삽 뜬 ‘고려대’

  1922년 4월 1일, 경영난에 빠진 보전을 살리고자 김기태, 김성수, 최준, 김원배, 박인호등 58명은 재단법인 사립 보성전문을 설립하고 교명을 회복했다. 하지만 재단법인에 기부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출연(出捐) 약속을 지키지 않아 재원은 점차 궁핍해졌다. 명순구 원장은 “재단법인을 설립해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지만 기부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데다 재단법인 내에서 분규가 거듭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인촌 김성수는 당시 경성방직과 동아일보를 운영하면서도 교육이야말로 민족자강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1929년 60만 원의 거금을 들여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경영한 데 이어한양전문학교라는 독자적인 전문대학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단법인 사립보성전문 이사였던 김병로와 보전 경영 문제를 상의하고, 고심 끝에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는 대신 보전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6월 김성수가 교장에 취임하면서 보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김성수는 보전을 인수한 직후부터 신 캠퍼스를 구상했다. 당시 보전이 자리 잡고 있던 송현동 교사는 매우 초라했기에 학교의 새로운 부지를 선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명순구 원장은 “동작동과 안암동이 후보지였는데, 인재를 기르기엔 땅이 넓고 고른 안암동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 내렸다”며 “이로써 보전은 종로시대에서 안암시대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부지 선정 이후 1934년 현재의 고려대 본관이 완공되고,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교수진을 임용하면서부터 김성수의 교육 철학이 실현됐다. 하지만 보전 교장으로 재임하던 당시 국민정신 총동원연맹 이사가 됐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쓰는 등 일제의 압력으로 친일행위를 해 오점을 남겼다. 오수열(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인촌이 일제강점 초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보전을 성장시킨 것은 분명한 공이다”면서도 “후기에 친일을 한 과오와 함께 객관적으로 평가해야한다”고 밝혔다.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장이 ‘고려대학교’ 설립 신청을 승인함에 따라 보전은 전문학교를 넘어 종합대학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 보전 강사였고 훗날 대한민국 제정헌법의 초석을 마련한 유진오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고려’라는 명칭은 김성수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는 고구려의 기개와 영광을 계승한 것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고려대는 1955년을 기점으로 현대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명문사립학교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글│정한솔 기자 delta@

사진│조은비 기자 juli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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