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향해 연구자로서 정체성 회복 중

강의 감소는 대학사회의 잘못

 

강사 투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김영곤(왼쪽)·김동애(오른쪽) 부부.
김동애 씨는 "투쟁에 나선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8월 네 차례 유예를 거친 끝에 강사법(고등교육법 일부개정안)이 시행됐다. 강사의 교원 지위가 일부 인정되고 방학 중에도 임금을 받게 됐다. 강사의 교원 지위 회복을 주장하며 여의도 국회 앞에서 12, 본교에서 8년간 농성한 김영곤·김동애 부부는 텐트를 모두 정리하고 충남 당진으로 낙향했다.

  당진 집은 아궁이로 불을 때는 오래된 집이다. 넓지 않은 공간에 책이 가득했다. 집 근처 비닐하우스엔 양파와 고구마가 자라고 있다. 한겨울 그나마 따뜻한 비닐하우스 한쪽에 앉아 8년간의 투쟁을 정리한 소회를 김영곤·김동애 부부에게 물었다.

 

- 텐트를 정리한 계기와 근황이 궁금하다

김영곤 |강사법 시행이죠. 작년 831일 서울총학에 텐트를 넘기고 당진으로 내려왔어요. 다음 총학이 텐트를 받을지 불확실하니까 제51대 총학생회와 협의해서 정리하기로 하고 민주광장에 강사 투쟁 기림판을 세운 거죠. 요즘엔 책 내고 해방 이전 충남지역 노동사를 연구하고 있어요.”

김동애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중이에요. 20년 동안 가장 역할하고 투쟁하느라 공부를 못했거든요. 밤새 강의 틀어놓고 책보니까 조금씩 원래 수준을 찾아가는 거 같아요.”

 

- 8년 전에 텐트를 어떤 이유로 설치했나

김영곤 |“2012년 당시 국립대학 강사료가 시간당 6, 7만 원 했는데 고려대는 51800원이었어요. 학교랑 교섭하면서 강사료 인상과 절대평가 실시를 요구했어요. 강사료는 찔끔 올려준다고 하고, 절대평가는 교육부 평가에서 불이익받을 수 있어 도입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김동애 | “교섭이 결렬된 날 중풍 전조증이 나타났어요. 2007년부터 국회 앞에서 농성하느라 춥고 열악한 환경에 오래 있었는데 교섭까지 결렬되니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던 거죠. 아프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저앉을지 아니면 상황을 돌파할지 고민하다 텐트 치자고 했죠. 김영곤 선생님이 건강도 안 좋은데 텐트 두 개를 어떻게 동시에 운영하냐고 하더라고요. 제가 고려대엔 학생들이 있으니까 가능하다고 했어요.”

 

- 농성 당시 하루 일과는 무엇이었나

김영곤 |텐트에 종일 있는 거예요. 저녁에 총장 퇴근하는 거 보고 우리도 여의도 텐트로 퇴근했죠. 밤에는 학생대책위원회가 텐트 지키고. 다음 날 아침에 저희가 다시 출근했어요. 온종일 바빴어요. 정세 판단하고, 국회와 강사법 논의하고, 학교와 교섭하고 재판하니까.”

 

- 투쟁 중 제일 힘들었던 시기를 꼽는다면

김동애 |“2013년 초에 학교가 천막 철거 가처분 신청을 냈어요. 구호 외치거나 플래카드 붙이면 50만 원, 본관 들어가면 50만 원 이런 식으로 하루에 450만 원을 내라고 하더라고요. 변호사들한테 물어보니 가처분은 대개 법원에서 다 들어준대요.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가 더 겁먹었던 것은 가처분을 받아들이면 고려대뿐만 아니라 전국 대학이 다 그렇게 되기 때문이에요. 대학 자유가 짓밟히는 게 저희 책임이 되는 거죠. 그래서 가처분 신청에 대해 정식재판을 청구했어요. 다행히 학교가 신청한 가처분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다만 본관 앞이 아닌 데로 텐트를 옮기라고 판결이 나왔죠. 내부적으로도 민주광장으로 텐트를 옮기자는 얘기가 나와서 자릴 옮겼어요. 덕분에 학생과 접촉면이 넓어졌습니다.”

 

- 텐트 안에서 학생들과 나눈 얘기는 무엇이었나

김영곤 |학생들 미래와 학습권의 관계를 주로 얘기했어요. 교수가 비판적으로 연구한 내용을 가지고 학생들과 토론하면 학생들은 자신과 주변 세상을 잘 이해하게 돼요. 그럼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을 수 있어요. 학생들은 그걸 이미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부모님이 인정하는 직업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건 학생과 사회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죠. 이를 위해선 강사가 자기 연구를 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해야 해요. 강사가 시작하면 교수는 따라와요.”

 

- 부부가 같이 농성하는 장단점은

김동애 | “같이 하니까 외롭지 않아요. 그리고 김영곤 선생님이 운동을 오래 한 운동 선배잖아요. 낙관적이에요. 전 문제가 생기면 거기에만 집중하는 성격인데 김영곤 선생님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봐요. 성품이나 운동방식이 서로 보완이 됩니다.”

김영곤 | “돈 문제 가지고 싸움이 안 나요(웃음). 돈을 같은 데 쓰니까 이의가 없죠.”

 

- 8년간의 투쟁을 자평한다면

김동애 | “주변 강사들이 말하길, 자기는 아무리 속상하고 억울해서 죽을지언정 싸움엔 못 나서겠대요. 그래서 투쟁하는 동안 사람을 모아 세를 불리고 조직화하지 못했어요. 대신 소수가 방향성을 잃지 않고 조금씩 전진했죠.”

김영곤 |“‘둘이서 고집 세게 싸우다가 이제는 시골에 쭈그려 앉아있다고 볼 수도 있죠. 하지만 텐트 덕에 학생을 교육·지도하고 학문을 연구할 때 비판의 자유를 회복했어요. 강사의 지위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그럴 여력이 생긴 겁니다.

  또 하나는 투쟁을 함께한 학부생이 자라 대학원생, 강사가 됐어요. 텐트를 계기로 강사-대학원생-대학생이 연결된 거죠. 여전히 교육공무원법’, ‘사립학교법등에서는 강사의 교원 지위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 법을 마저 고쳐나가는 데 그들이 큰 역할을 할 거라 봐요. 학부 시절부터 알아 왔으니까. 그런 지혜가 도망가는 게 아니잖아요. 잠재적 원동력이 생긴 겁니다.

  다만 장기적인 과제라 생각해요. 저희 에너지를 학생들과 손잡고 소진했잖아요. 다시 힘이 쌓여야 해요. 강사가 투쟁에 나서면 잘려요. 쫄 수밖에 없죠. 위축감을 극복하고 학생들의 힘을 모으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 강사법 시행 후 강의 감소가 발생하자 강사법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김동애 | “강사법은 부족할지 몰라도 잘못된 게 아니에요. 강사법이 아니라 대학사회가 잘못한 겁니다. 최근에 무형문화재를 전수하던 강사가 학위가 없다고 해고되자 극단적 선택을 해 숨진 일이 있었어요. 그런 죽음은 대학 내부에서 만든 거예요. 강사법엔 학위가 없더라도 연구실적이나 교육경력이 있으면 강사로 임용할 수 있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 학교도 동료강사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후배 강사들한테 부탁하고 싶은 건 투쟁을 호도하진 않았으면 한다는 점이에요. 여러 강사의 희생을 통해 본인 강사료가 오르고 교원 지위도 일부 회복했잖아요.”

 

- 고려대 구성원들에게 남길 말이 있다면

김영곤 | “최근 호주 산불에서 알 수 있듯 생태환경이나 지속가능성 같은 문제는 전인류적 과제잖아요. 그런 문제를 풀기 위해선 자유로운 사고와 토론이 필요해요. 강사들의 싸움이 작아 보이지만 강사의 지위를 보장함으로써 그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어요. 그러니 그 자유를 마음껏 활용했으면 해요.”

김동애 | “강사 교원 지위를 회복하는데 고대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어요. 같이 투쟁에 나서주고 금전적으로도 많이 지원해주셨죠. 투쟁을 도와준 모든 분께 다 고마워요. 앞으로 전공(중국 근현대사) 공부를 하려고 해요. 느긋하게 마음먹고 하면 되겠죠. 이것도 포기하지 않고 할 생각입니다.”

 

조민호 기자 domino@

사진두경빈 기자 hayab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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