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공간을 떠나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막연한 기대와 달리 자립에는 힘겨운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했을까. 탈시설 한 그들이 얻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장애인 탈시설 당사자 4명을 만났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들은 나와 살아 좋다, ‘모두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상분(42·) 이순복(38·)

시설은 그냥 싫은 곳

이순복 씨는 "그냥 어쩌다보니 시설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상분 씨는 동네 동생인 이순복 씨와 함께 인터뷰 장소에 들어섰다. 좋아하는 색으로 머리를 물들였다는 이상분 씨는 카페라떼를 주문했고 이순복 씨는 딸기 프라푸치노를 시켰다. 둘은 어린 시절 서울시립 소녀의 집에서 시설 생활을 함께 시작한 사이다.

  이상분 씨는 9살에 친동생과 함께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서울시립 소녀의 집에 입소했다. 어떻게 시설에 입소하게 됐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어쩌다 보니 시설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어쩌다 보니 동생과 헤어지게 됐다. 비장애인인 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고, 이상분 씨는 강원도 철원에 있는 은혜요양원에 가게 됐다. 은혜요양원은 중증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다.

  “그냥 싫었어요이상분 씨에게 시설은 그냥 싫은 곳이었다. 끼니마다 밥과 국과 반찬을 말아주는 것도 싫었고 이유 없이 맞는 것도 싫었다. 같은 입소자가 맞다가 죽는 경우도 왕왕 봤다.

  밤에는 움직일 수 없도록 묶어놓는 것도 싫었고, 자지 않으면 목에다 주사를 놓는 것도 싫었다. “우리 때는 그런 게 흔했어요.” 이순복 씨가 말을 거들었다. “은혜요양원 말고도 너무 많았어요. 은혜요양원이 미디어를 타서 그렇지, 장애인 하면 개보다도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으니까.” 경기도 용인에 있는 서울시립 영보자애원에 있었던 이순복 씨는 은혜요양원만 주목받는 것이 내심 속상했다. “시설에는 자유가 없었어요. 외부로는 못 나갔고, 규정만 따라야 했어요.”

  이상분 씨가 시설에서 좋았던 건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뿐이다. 시설에서 교제는 불가능했다. 시설 선생님들이 싫어했다. 그래도 지금의 남편은 몰래 마주칠 때마다, 이상분 씨를 위해 노래를 불러줬다. 이름도 나이도 몰랐다. 2013년 겨울, 탈시설 후 서울에 와 서로를 알아가고 결혼할 수 있었다. 헤어진 동생과도 탈시설 후에야 재회했다. 시설에 있는 동안엔 동생과 연락할 수 없었다.

  요즘 시설은 때리지 못하게 돼 있다고 하자 이상분 씨는 원래 시설은 때려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시설에서 때리지 않는다는 걸 믿지 않았다. 이순복 씨도 덧붙였다. “당시에는 다 그랬어요. 컨트롤 잘 안 되는 거 같으면 때렸어요. 우리 말도 잘 안 듣고.”

  최근에 이상분 씨는 비즈공예와 십자수를 배우고 있다. 초대받은 집에는 부부의 사진과 그가 만든 작품들이 걸려있었다. 동행한 이순복 씨는 비장애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에게도 꿈이 있고, 느리긴 해도 조금만 옆에서 거들어주면 할 수 있어요. 너네는 나가서 못 산다고 그러는 게 좀 그래요. 시설에 있는 동안 바보가 된 거 같았어요. 밥 먹으라고 하면 밥 먹고, 자라고 하면 자고, 그래서 탈시설 한 거 같아요. 우리도 나와서 살 수 있어요.”

 

김희선(45·)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김희선 씨는 이제 부모님께 매달 용돈을 보낸다.

  김희선 씨가 20살 때, 아버지는 목사님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김희선 씨에게 학교를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에 가는 게 아니라고 느낀 그는 싫다고 했다. 부모님이 화를 냈고, 차에 올라타게 됐다. 도착한 곳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신애원이었다. 그곳에서 김희선 씨는 23년을 살았다.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예배를 드려야 했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외우고, 12시에 밥을 먹고, 오후 5시에 밥을 먹고, 오후 9시에 자야 했다. 그 중간중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자면 혼났다. 아마 낮잠을 자면 밤 취침 시간에 자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옆자리 언니가 도망갔어요.” 김희선 씨가 기억하는 언니의 도망은 탈시설이었다. 언니가 나가는 걸 말하지 않았다고 원장 선생님이 때렸다고 한다. 언젠가 탈시설한 언니와 오빠들이 신애원에 왔다. 같이 나가자고 했지만, 김희선 씨는 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김희선 씨의 어머니는 참으라고만 말했다. 그렇게 5년을 참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을 때, 도망간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탈시설 하겠다고 말했다. 다시는 가족과 연락하지 않겠다는 결심까지 한 상태였다. 어머니가 전화를 걸었다. 김희선 씨에게 미친 거 아니냐고 말했다. 김희선 씨는 더 이상 못 살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자고 싶으면 잘 수 있다. 탈시설 해서 제일 좋은 건 자유였다. 김희선 씨는 탈시설 해서 다 좋다고 말했다. 탈시설 후, 부모님과의 관계도 바뀌었다. 탈시설을 누구보다 반대했던 부모님에게 이제 김희선 씨는 매달 용돈을 보낸다. 본인이 노동해서 받은 돈이다. 지금 김희선 씨는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가만히 있었더니 자유로운 생활이 손에 떨어진 건 아니었다. 탈시설 후, 김희선 씨는 활동지원보조서비스 시간을 늘리기 위해 투쟁했다.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했지만 받을 수 없었다. 이미 자리가 다 찼다는 이유였다. 작년 연말, 투쟁의 결과로 다시 활동지원서비스 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김희선 씨에게는 아직 남은 걱정거리가 있다. 주거시설이다. 김포시의 체험홈은 2년이 만기다. 2년 후엔 2000만 원을 내고 공공임대주택으로 가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2년이 넘었지만 김희선 씨는 아직 체험홈에 머무르고 있다. 김희선 씨의 탈시설 조력자인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박은정 탈시설지원팀장은 처음 체험홈을 마련하기 위해 임대를 요청했을 때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임대인들이 꺼려해 어려움이 있었다그 어려움을 겪고 체험홈을 겨우 마련했는데, 2년 만에 자금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려움은 남았지만, 김희선 씨는 시설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나와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보니까 더 좋은 자유가 있고, 다 있으니까. 꼭 나오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는 오늘도 권익옹호활동가로 활동 중이다.

 

추경진(53·)

장애인과 산다고 집값 안 떨어져요

추경진 씨는 "좀 같이 살아보고 그래야지"라고 힘주어 전했다.

  서른이 되던 1997, 추경진 씨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기억이 다 날아갈 정도의 큰 사고였다. 경추 3·4번이 부서졌고, 전신마비가 왔다. 그렇게 장애인이 됐다.

  장애인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경제 능력이 없어진 현실은 가장에게 쉽지 않았다. “그때는 활동지원서비스도 없을 때였으니까, 방법이 없었죠.” 우울증이 왔다. 2001, 힘겨운 현실에 넌지시 시설에 입소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일사천리로 입소가 결정됐다. 햇수로 15, 충북 음성군 꽃동네 시설 생활의 시작이었다.

  처음 입소를 한 후 6개월 동안은 그냥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한 방에 최소 13, 최대 23명까지 함께 생활했던 시절이었다. 침대는 빽빽이 위치해 빈틈을 만들지 않았다. 사람이 많아 간호사들이 무심코 사람을 밟기도 했다. 나갈 즈음 돼서야 8명이 한 방을 쓸 수 있었다.

  봄·여름이면 밖에 나갈 수 있었지만, 겨울에는 꼼짝없이 방에만 있어야 했다. 뭘 부탁해도 되는 게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한 번 해주기 시작하면 모두에게 다 해줘야 한다는 논리였다. 휠체어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그의 하루 일정은 단조로웠다, “일어나서 누가 밀어주면 산책하고 멍하니 있다가, 밥 먹으라고 하면 밥 먹고. 컴퓨터 들어온 후에는 컴퓨터 하고 그랬죠.” 1년에 한 번, 시설 전체가 가는 휴가가 유일하게 밖으로 나갈 기회였다. 가족이 차를 가지고 오거나 큰 병원에 갈 일이 있을 때도 나갈 수는 있었다. 가족이 찾아오지 않고, 큰 병원에 갈 일 없는 입소자에겐 꽃동네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2011, 뇌성마비를 가진 두 명의 입소자가 탈시설 한다고 하자 시설이 시끄러웠다. 시설 관계자는 나가서 살 수 있겠냐고, 나가자고 꼬시는 사람들은 다 너희들을 이용해 먹는 거라고 했다. 추경진 씨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부양의무제 때문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도움 준 것도 없는데. 괜히 나갔다가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죠라고 말했다.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설에서 죽기는 싫었다. “여기서 죽으면 나 찾아올 사람이 있나 싶기도 하고, 내가 살던 서울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한 번 살던 동네 돌아다니고 싶은 거.” 그의 탈시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그는 노원구 상계동 전셋집에 살고 있다.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대출서비스로 12000만 원을 빌리고, 나머지 2000만 원은 본인이 마련해 들어간 집이다. 2011년 장애인연금 제도가 시작돼 처음으로 만져본 통장을 시작으로 악착같이 모은 돈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가족과의 단절이 인정돼 수급을 받아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중간에 한 번 일이 있긴 했다. “큰딸의 월급이 올랐다고 생계급여가 5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깎인다고 그러더라고. 법이 그런 거라고. 주민센터에 가서 가족단절 됐다는 서류를 제출해서 어떻게 넘어갔어요.”

  그에게도 자유로움이 역시 탈시설의 최대 장점이다. “시설에서는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어요. 그냥 다 안 돼라는 말로 끝났지. 근데 여기서는 돈만 있으면 먹고 싶은 거 시켜먹고,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고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너무 좋죠.” 추경진 씨는 이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같이 산다고 집값 안 떨어져요. 좀 같이 살아보고 그래야지. 우리도 똑같은 사람인데.”

 

정용재 기자 ildo114

사진두경빈·양태은 기자 press@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