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54일 필자의 연구실을 거쳐 지금은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다.

 

제자들에게,

 

  어떻게들 지내는가? 하는 일은 어떠한지? 모두들 무탈하겠지? 난 그대들의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오.

  부총장의 임무를 마무리하고 1년의 연구년 그리고 돌아온 교정의 설레는 기다림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시간과 공간으로 초대하는구려. 텅 빈 강의실에서 삼각대 위에 설치한 카메라와 대면하며 녹화 강의를 하거나, 연구실 컴퓨터 앞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실시간 인터넷 수업은 30년 가까운 강의 경험이 무색할 정도로 참 익숙지 않은 일이었네. 처음에는 눈을 어디에 맞추고 강의의 방점을 어디에 찍는 것조차 어색하였지만 지금은 많이 친숙해졌다오. 이런 비대면의 일상이 벌써 7주나 지났고 이번 주에는 중간고사 그리고 다음 주에는 문자 그대로 대망(待望)의 강의실 대면 수업을 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네. 무엇보다 [사회학적 상상력] 수업에서 20학번 신입생 제자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마음은 살짝 들떠 있으며, 당장 월요일 수업을 어떻게 멋지게 꾸려볼지 고심하고 있다오.

  지난 1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 발생 이후, 3월과 4월의 엄혹한 시간을 거치며, 춘래불춘래(春來不春來), 봄은 봄인데 봄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만큼 절절하게 체험한 적이 있나 싶구려. 시간을 1975년 봄으로 돌려 대학 입학한지 한 달여 만에 긴급조치라는 공권력에 의해 교문은 강제로 오랜 시간 굳게 닫혀 봄이 봄이 아니었던 시절을 떠올려보기도 한다오. 그러나 그때는 불안과 공포의 시절이었지만 누구와의 만남을 주저하지는 않았다오.

  우리가 언제 이번 봄처럼 매일 공표하는 숫자에 초미의 신경을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 싶네. 확진자수, 사망자수, 완치자수, 우리나라를 넘어 해외의 숫자까지 말일세. 5년 전 메르스사태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오. 그런데 정작 공포는 그때나 지금이나 숫자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던 것 같구려.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려보면, 방문할 때마다 그 장엄한 문명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한 이탈리아의 지금 상황은 절망이라는 표현이 모자라는구려.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슈퍼강대국으로 여겨지는 미국의 상황은 허망이라는 표현이 부족하다오. 몇 해 전, 뉴욕 맨해튼을 여러 날 제법 샅샅이 탐방한 뒤 메모장에 여긴 제국이라고 적었던 나의 결론에 이건 뭐지?’ 라고 반문하고 있다오.

  많은 것을 다시 보게 하는구려. 평소(平素), 일상(日常)의 소중함을 요즘처럼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싶네. 극히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 이렇다할만한 시선도 받지 못한 아주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체득하면서 말이오. 집의 재발견은 물론이고, 학교도 강의실도 다시 보게 되는구려. 무엇보다 나의 강의를 무던히도 들어주는 학생들이 있어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오. 평소의 소박한 다짐을 다시 다져 본다오. 나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연출가이고 그대들이 주연임을 오랜만에 열리는 강의실에서 펼쳐보겠다고 말일세.

  그동안 우리 모두가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너무 많이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이켜본다오. 만남과 그 만남의 방식, 교육과 그 교육의 방식, 소비와 그 소비의 방식 같은 것에 대해 말일세. 이번 사태를 경험하면서 이른바 웰빙이란 조금 불편하게 사는 것이라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확인한다오.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줄이다 보니 책을 접하는 시간은 조금 더 늘어나더군.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은 책 몇 권 소개해 보려고 하네. 리처드 세넷의 <투게더(Together)>를 다시 책장에서 꺼내 보았네. 이런 구절에 줄을 쳐놓았더구먼. “우리 모두는 욕구와 우리의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혹은 자신과 타인들의 욕구가 상충하는 경험도 한다. 이 경험에서 우리는 겸손을 배우게 되며.” 바로 얼마 전에 출간된 이탈리아 작가 파울로 조르다노의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Nel Contagio)>는 한마디 한마디가 절절하다네. “여태껏 일상생활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정확히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던 정상 상태가 한순간에 우리가 지닌 가장 신성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항상 나의 시선 반경 안에 놓여있는 옌스 바이드너의 <지적인 낙관주의자(Optimismus)>를 다시 들쳐보았네. 이 책은 학술서는 아니지만 평범한 메시지가 지금의 상황만이 아니라 그대들의 살아감에 있어 필요해 보여 소개하네. “낙관주의자는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기회를 본다. 최고의 낙관주의자는 심지어 그 상황을 즐기기까지 한다.”

  코로나 이후에 대한 전망이 엄청나게 쏟아지는구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벌써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라는 연대기가 등장하였고, 대변혁 대격변이 온다와 같은 표현은 식상할 정도가 되었구먼. 다만 지금 고초를 겪고 있는 현대 문명이 범했던 우를 똑같이 밟지 않았으면 하네. 조급한 마음에 보폭을 감당하기 어렵게 넓히고 무리하게 건너뛰는 예상, 예측, 예언들이 혼재하고 난무하여 또 다른 불안과 현혹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네. 좀 더 기본에 충실한 진단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오.

  지금을 어떤 사람은 잔혹의 시대라고, 어떤 사람은 불안의 시대라고, 어떤 사람은 성찰의 시대라고, 어떤 사람은 기회의 시대라고 하네. 잔혹이 희망 없는 염세주의로 빠지지 말고, 불안이 대책 없는 모험주의로 선회하지 말고, 성찰이 정작 자신은 쏙 뺀 자기예외주의가 되지 말고, 기회가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기대지 말기 바란다오.

  이번 경험에서 우리 모두가 겸손을 배웠으면 하네. 이번 경험에서 다소 불편하게 사는 법을 곁눈질이라도 하면 좋겠네. 이번 경험에서 평소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를 바라네. 이번 경험에서 신뢰나 책임 같은 기본에 충실하기를 기대해 보네.

  이제 다시 평소처럼 개강하면 강의실도 교탁도 한 번 쓰다듬고 보듬어주려고 마음먹고 있다오. 우리 학생들 기다리느라 수고 많았고, 다시 반겨주어 고맙다고 말일세.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다짐을 한다오. 지금까지와는 결이 많이 다른 우아하고 생생한 글쓰기를 해볼 생각이라고 말일세.

  그대들의 근황이 궁금하여 안부 몇 자 물어보겠다고 쓰기 시작한 편지가 길어졌구려.

  항상 건강 챙기고 가끔 보도록 합시다.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기대감과 고마운 마음을 담아.

202054일 늦은 저녁 시간에

박길성

박길성 (문과대 교수·사회학과)
박길성 (문과대 교수·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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