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을 여럿 봤다. 정부가 최근 임신 14주까지 낙태를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개정안을 추진해서다. 이번 발표를 두고 누구는 여성의 권리를 위한 낙태죄 전면 폐지를, 또 누구는 태아 생명권 보호를 위한 개정 중단을 주장했다.

  내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기자회견을 보면서 그래도 낙태죄 문제는 이러저러하게 해야지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법도 한데, 뚜렷한 주관이 생기지 않았다.

  3년 전 이맘때는 나도 저들처럼 거리에 나왔었다. 당시 강남역 10번 출구 옆에서 성 혐오는 이제 그만’, ‘양성평등 원해요라는 말이 적힌 팻말을 들었다. 고등학교 인문학 체험활동의 일환으로, 자유롭게 만든 캠페인 계획서가 뽑혀 학교에서 경비 일체를 받았다.

  오래된 계획서를 꺼내 보고는 어리숙해 보이는 문구에 웃음이 나왔다. 캠페인은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해서살인을 저질렀다는 가해자의 말에서 불거진 성 혐오 논란을 겨냥했다. ‘성 혐오를 알리고 문제 완화에 보탬이 되겠습니다.’ 참 명쾌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지난 3년 동안 옳은’, ‘한계가 있는’, ‘확신이 없는을 거쳐 헛웃음이 나오는수준에 도달했다. 성 혐오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리면 문제가 완화되는지, 그럼 그 문제는 무엇인지. 모든 게 복잡하고 막막해 지금은 운을 떼기조차 어렵다. 3년 전 생각처럼 간편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비슷한 이유로 다양한 사회 이슈에서 나의 옳은 세상은 그 입지를 잃었다. 뒤섞인 주장을 내놓는 사람들 속에서 내 주관은 좀처럼 서지 못했다.

  ‘좋은 게 좋다는 말을 해석하면 앞의 좋음은 대체로 나쁘고, 뒤의 좋음은 앞의 나쁨을 긍정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좋은 게 좋은세상에서는 대충 자기 편을 따라가는 현실과의 타협이 성행한다.

  ‘옳은 것을 찾기 어려울 때는 옳은 게 옳은 것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복잡한 맥락은 잘라내고 자기 편이 결과적으로 옳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주관이 생기지 않을 때는 옳음에 대해서 일단 스탠바이하려고 한다. 진실을 알리는 감독의 큐 사인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다. 낙태죄에 대해서라면,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최낙준 기자 cho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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